“왜 날 연기하고 싶어요?”
“전 이해하기 어려운 캐릭터가 좋아요”
신문 1면을 장식하며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충격적인 로맨스의 주인공들인 ‘그레이시’(줄리안 무어)와 그보다 23살 어린 남편 ‘조’(찰스 멜튼). 20여 년이 흐른 어느 날, 영화에서 그레이시를 연기하게 된 인기 배우 ‘엘리자베스’(나탈리 포트만)가 캐릭터 연구를 위해 그들의 집에 머물게 된다. 부부의 일상과 사랑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엘리자베스의 시선과 과거의 진실을 파헤치는 그의 잇따른 질문들이 세 사람 사이에 균열을 가져오는데...
정환
4.5
자신들의 사랑이 진짜였다는 최면을 걸어야지만 겨우 견딜 수 있는 사랑을 하던 애벌레에게 사랑의 근간을 묻기 시작하자, 자신이 여전히 나비가 되지 못했다는 것 또한 깨닫고야 만다. 그렇지만, 어른들이 하는 일들을 호기롭게 알려주던 이들조차 여전히 나비가 되고 싶은 (혹은 되지 못한) 애벌레처럼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다. . .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누구일까. 엘리자베스의 이야기, 그레이스의 이야기, 그리고 어느덧 조의 이야기. (나탈리 포트만과 줄리앤 무어의 연기를 감상하려다 찰스 맬튼의 연기에 더 놀랐다. 개인적으로는 올해 나왔던 플라워 킬링 문에서의 로버트 드 니로나, 오펜하이머에서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연기보다도 더 좋았다.) 누구를 의심하고 누구에게 정을 줘야 할지, 누구를 안타까워 해야 하는지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게 만든다. 뒤틀린 사랑의 형태를 보여주는 이야기일 거라 생각했지만, 이상한 유머를 바탕으로 사람들의 오만과 편견에 대한 희롱이 인상적인 영화였다. 영화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앵글 안에서 불편한 사랑을 소재로 한 이야기의 진실과 당사자의 진심들을 헤아리며 나아가는 듯하지만, 매혹적인 미장센을 부수고 등장하는 괴이한 음악이 이곳과는 어울리지 못하는 또 다른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경고한다. 호의가 가득한 어투에 어딘가 균열된 대화들을 느낄 때마다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한 채, 불안정한 분위기를 받아들인다. 제아무리 누군가가 그들을 향해 돌을 던져도,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버텨왔다. 그러나 가까이서 지켜본 그들의 모습은 매우 불안정하다. 돌을 던져도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단단한 게 아니라, 이미 무너져 더 이상 붕괴될 것이 없어 보일 만큼 위태로운 개인이다. 그럼에도 위태로운 이 둘 사이의 사랑만큼은 굳건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외부인의 등장으로 둘은 지금껏 줄곧 사랑이라 믿어온 것을 다시 돌아본다. 가린다고 가려지지도 않은 것들이라 진작에 모두가 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조차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았던 사랑이다. 타인의 사랑을 유희하는 외부인들의 스토리텔링들이거나, 차마 그땐 보지 못했던 내 모습을 거울처럼 마주했기 때문이었건, 애써 감춰왔던 사랑의 최면을 끝내어 그제야 우리 사랑의 근간을 묻게 된다면, 그것부터가 이 사랑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럼 사랑의 위태로움을 초래한 것이 그들을 흔들어 놓은 외부인들의 잘못인가. 그것은 비단 그들의 사랑뿐만이 아니라, 외부에 의해 흔들리는 사랑이 있다면, 그것 자체만으로 사랑의 기반이 부실하다는 증거가 되지 않나. 그럼 이 부실한 사랑을 시작하게 된 당사자들의 잘못인가. 영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른 이야기들을 마저 건드린다. 이것은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신들의 사랑이 진짜였다는 최면을 걸어야지만 겨우 견딜 수 있는 사랑을 하던 애벌레에게 사랑의 근간을 묻기 시작하자, 자신이 여전히 나비가 되지 못했다는 것 또한 깨닫고야 만다. 그렇지만, 어른들이 하는 일들을 호기롭게 알려주던 이들조차 여전히 나비가 되고 싶은(되지 못한) 애벌레처럼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다.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오고 가지만, 정작 내가 누군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의 태반이다. 누군가는 어떠한 목적, 꿈을 이루기 위해 날갯짓을 준비하는 것처럼 보이고, 누군가는 자신이 아직도 애벌레인지 깨닫지도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들은 스스로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다른 누군가를 비판하는 말을 할 때, 마치 자기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듯 말하는 것들을 보고 있다면 말이다. 알면서도 보지 않는 것일까, 정말로 모르고 있는 것일까? 영화에서 여러 거울샷들이 등장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누군가를 연기한다는 것은 어딘가 모순되어 보인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타인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과연 옳은 사람인가, 이 사랑이 과연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나도 나를 모르는데 다른 사람의 시선들로 내린 정의를 믿는 것도 참 웃기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조금의 외부의 침입에도 흔들릴 만큼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못한 내부 때문이려나. 과연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지 알기는 할까. 진심, 사랑, 호의, 경멸, 연기와 진실이 수없이 얽혀있는 이 공간에서 날갯짓 한번 해보겠다는 내가 얼마나 우스운지를.
이동진 평론가
4.0
되묻지 않았던 것들의 선득한 귀환, 의심하지 않았던 판단의 앙상한 잔해.
재원
4.0
한순간쯤은 인생도 영화처럼 NG 내고 다시 찍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런지. 촬영 현장을 봤다면 그 덩치 큰 소년도 그리 생각했겠지.
STONE
4.5
회색 지대 속 진실은 당사자의 뒷모습이 아니라 페르소나의 앞모습에서 시작된다.
하리
3.5
가짜 스포 듣고.. 퀴어 영화인줄 알고 중후반까지 그래서 둘이 언제 키스하는지 기다림
신상훈남
4.5
연기는 거짓되고, 거짓은 중독되며, 중독은 순환된다. 엘리자베스가 정말 무서운 건, 그녀가 느끼는 모든 감정이 다 '연기'로 시작하여 그것에 '몰입'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레이스가 살면서 느껴왔던 모든 감정들을 엘리자베스는 끊임없이 조사하고 시도하며 그 과정에서 둘 사이에서 느껴지는 유대감이 굉장히 불쾌하게 자리잡는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인물과 인물 사이의 관계가 끈적해질수록, '이러면 안 되는데' 죄의식이 자리잡는다. 모든 것은 '의도'의 문제다.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스를 이해하려는 '순진무구 호기심'보다는, 연기를 하겠다는 '집념의 목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으니까. 그레이스가 조를 사랑하면, 엘리자베스도 그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이었고 그런 심리적 압박감이 드는 상황에서 키스할 듯 말 듯 조를 바라보는 엘리자베스의 눈빛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너무나도 이상했다. 후반부에 나오는 베드씬보다 영화에 드러나있는 감각만으로도 충분히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대를 낮추면 실망도 작게 한대요.” “그래서 뭘 기대했는데요?” “오늘밤이 잘 지나가기를. 아이들이 나를 사랑해주기를. 내 인생이 완벽해지기를.” 그레이스의 감정 표출은 굉장히 절제되어 있지만, 그녀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에 대한 묘사는 확실한 편이다. 그녀의 내면엔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죄의식을 명확하게 입력되어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주변의 눈치를 보고, 일종의 컴플렉스를 갖고 있다는 게 다 보일 정도였으니까. 그레이스가 크게 상심하는 장면들도 전부 그것과 연관되어 있다. 자신의 행동이 불특정다수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그녀는 결코 타인에게 무관심한 스타일이 아니다. 외려 너무나도 예민해서 그것에 눈과 귀를 닫으려고 노력하고, 자신의 속이 들킬까 봐 그저 가리기에 급급하다. 보이지도 않는, 가운 속에 입을 옷을 오랫동안 고민해주는 것처럼. “갑자기 왜 그래?”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냥 내 이야기를 하는 건데.” 누구에게나 현실을 부인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지금껏 아무 의심 없이 잘 살아왔을 각자의 삶에서, '합리적이고도 부정적인 기억'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내가 진정 이 사람을 사랑하는 게 맞나' 같은 하찮은 사색을 시작으로, '나는 아직 어린데 왜 이 사람과 결혼했지?' 같은, 처참한 결론을 도출하기까지 이른다. 그렇게 되면 '이러면 안 되는데' 같은 윤리의식과 끊임없이 부딪치며 감정은 외로워지고 심신은 흔들린다. 그레이스와 조는 영화가 후반부로 치닫을수록 그 고통이 극심해진다. 하지만 아무 흔들림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엘리자베스다. 어쩌면 당연하다. '연기'라는 것이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고, 그녀는 그것을 제일 잘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이 영화의 명장면] 1. 블러셔와 립스틱 블러셔와 립스틱은 기초화장이 아니다. 기초를 끝낸 뒤 최후의 아름다움을 장식할 수 있는 화장이다. 그레이스는 그 장식을 엘리자베스에게 직접 해준다. 이것은, 기초가 다른 화장을 서서히 같에 만들어주는, 어쩌면 파멸로 이끄는 길을 그레이스가 직접 주도하게 되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녀는 결국 어떠한 사단이 벌어질 때 남탓을 하지 못 한다. 자신이 주도적으로 완성시킨 화장이니까. 돌이켜 보면 그녀의 인생은 늘 그러했다. 자신이 선택한 남자고, 자신이 선택한 불륜이었으며, 자신이 선택한 결혼생활이다. “늘 배우가 되고 싶었나요?” “항상요.” 2. 네블라이저 엘리자베스는 정말 새로운 네블라이저를 쓰는 방법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불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삶에 패턴엔 '불편한지 아닌지'가 중요하게 작용된다. 새로운 네블라이저를 쓰지 못 한다는 것보다, 그레이스를 연기하면서 조와의 관계를 이끌어 나가지 못 한다는 것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순간의 불편함을 무마시키는' 네블라이저보다, '영원의 연기를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더 그녀의 인생을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였으니까. 엘리자베스는 그 질기고 어두웠던 유혹의 끝에 종지부를 찍는다. 비겁하게도, 관객들은 이 장면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점점 연약해져가는 그레이스를 옆에 두고 어딘가 측은지심을 느끼는 조가 저렇게까지 되는 걸 모두가 어렴풋이 알고 있기도 했고. “조언 하나 해줄까요? 당신이 챙겨야 할 건 당신 하나뿐이에요.” 불완전해 보이고 늘 흔들리고 있었던 그레이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며 따라하고 그녀가 느꼈던 모든 감정을 깊이 이해해버린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가 마지막 테이크 때 오케이 사인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찍고 싶어하는 것은 완벽을 추구한 것이 아니다 “내 자아는 튼튼해요. 그 점 꼭 짚어주세요.”
무진장뱅크(feat:진격의*몽글쌤)
4.5
화사함(메이) & 사화함(디셈버) 절대 맞닿을 리 없는 그 모순되는 것들이 같은 시공에 엉켜졌을 때 빚어지는 독버섯 같은 마력
zerkalo
3.5
스포일러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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