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과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 바로 그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이라는 것.”
그렇게 우리는 하루를 살아낸다. 그리고 그 하루하루가 모여 일생이 된다. 나는 그들이 매일 돌보는 것들을 생각했다. 당근이나 배추 혹은 감귤 같은 것들이 보살핌 속에 잘 자라 사람들의 저녁식탁까지 오르게 되는 과정을 생각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당근이나 배추 혹은 감귤 같은 것의 구체적인 모양과 질감과 향 같은 것들이 손에 잡힐 듯 또렷해졌다. 그들이 낮동안 열심히 일해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밤의 사람들에게 다시 살아갈 힘을 내게 하는 것. 나는 그들이 모여서 듣는 내 이야기도 그런 것이 됐으면 싶었다. 그날의 낭독회 이후, 소설에 대한 나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산문보다는 소설을 더 많이 쓰게 됐다. 강연회보다는 막 지은 짧은 소설을 읽어주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낭독회를 더 자주 하게 됐다.
그런 낭독회에서 사람들에게 읽어주기 위해 쓴 소설들이 모여 이렇게 한 권의 책이 됐다. (……) 낭독이 끝난 뒤에는 오신 분들께 이야기를 청했다. 어떤 일을 하시는지, 요즘 관심사는 무엇인지, 이 낭독회에는 어떻게 오게 됐는지. 그러면 누군가 손을 들고, 다들 그 사람을 쳐다본다. 나도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 바로 그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_「작가의 말」 중에서
……그리고, 김연수의 ‘다음’ 걸음
지난해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출간한 후, 김연수는 여러 번, 그사이 “바뀌어야 한다는 내적인 욕구”가 강하게 작동하는 동시에 “외적으로도 바뀔 수밖에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고 언급한다. 신간 『너무나 많은 여름이』는 그 시기를 건넌 뒤 쓰여진 짧은 소설들로, 변화에 대한 내적인 욕구와 외적인 요구가 옮겨놓은, 김연수의 ‘그다음’ 첫걸음인 셈이다. 작가는 이 소설들을 여러 서점과 도서관에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독자들에게 들려주었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작품들은 독자와 직접 만나면서 조금씩, 계속 바뀌었다. 2021년 10월 제주도에서 2023년 6월 창원까지, 그렇게 여러 도서관과 서점에서 이 소설들은 쓰여지고, 읽고, 듣고, 또 ‘다시’ 쓰여졌다.
모든 사물들 속에 숨어 있는 이야기를 찾아내던 작가는 이제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하고, 들여다보고 그 안의 이야기들을 직접 듣고, 다시 쓴다. 이야기를 지어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고 함께 나눈다. 끊임없이 서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던 소설 속 인물들은 이제 밖으로 걸어나와, 작가와 직접 대면한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은 그전의 소설들과는 조금은 결이 다르게 읽힌다. 그렇게 이야기와 삶이 서로를 넘나들며 스며드는 과정을 함께 경험함으로써, 그렇게 태어난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왜 어떤 삶은 이야기를 접한 뒤 새롭게 시작되는지, 그리고 이야기를 사랑하면 왜 삶에 충실해지는지, 저절로 알 수 있게 된다. (「너무나 많은 여름이」를 제외하고는) 짧게는 16매부터 길어도 50매가 채 안 되는 소설들은, 삶의 어느 한 장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삶 전체를 관통해 지나가며 우리를 멈칫, 하게 만든다. 지난날을 돌이키며 반성하거나, 미래를 부러 계획하고 다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무언가가 몸 전체로 불쑥 스며들어와 깨어나게 하는 듯하다. 그의 작품 속 소설가처럼, 무엇을 하기 위해 애쓰거나 노력하지 않고, 그저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다보면 “그후에 새롭게 펼쳐지는 세계를 목격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만으로”
글쓰기는 인식이며, 인식은 창조의 본질인 셈입니다. 그리고 창조는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에서만 나옵니다. 타인에게 이유 없이 다정할 때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지금까지의 삶의 플롯이 바뀝니다. 비록 저는 그 사실을 모르고 살았지만, 제 뒤에 오는 사람들은 지금 쓰러져 울고 있는 땅 아래에 자신이 모르는 가능성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 세계를 실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만으로 말입니다.
_「젖지 않고 물에 들어가는 법」 중에서
“이전까지 소설가로서 정체성이 있긴 있었겠지만, 이제 좀 달라졌다. 쓰는 게 좋아서, 좀 잘 쓰고 싶어서 썼지만, 지금은 이야기의 역할을 이해하게 되면서 더 좋은 이야기를 제공해야겠다는 생각이 확실해졌다. 모슬포의 작은 서점에서 열린 낭독회에 갔는데, 작업복을 입고 피곤하고 졸리는 표정의 독자들이 참석했더라. 그들에게 이야기를 읽어주면서 마치 빵이나 밥 같은 것을 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제 소설이 허기진 누군가한테 제공되는 정신적 빵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_김용출 기자, 세계일보, 2022년 11월 22일자 인터뷰에서
사실 작가에게는 언제나 이야기가 중요했고, 거대한 역사 속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의 역사/이야기가 더욱 중요했다. 작가 혹은 인물의 입을 통해 직접 발화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소설을 읽으며 독자들은 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저도 모르게 위로받곤 해왔다. 그의 소설은 여전히 우리에게 다른 누가 되라고 하지 않는다. 멋있는 사람이 되라고,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자신이 되라고, 더욱더 내가 되라고 한다. 다만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작가는 더욱 고민한다.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사는가, 어떤 이야기를 만드는가에 관심이 많다. (……) 어떻게 이야기하느냐에 따라서 현재의 상태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조금 더 좋은 방식으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을까, 그게 어렵다면 미래도 만들어내서, 상상을 해서, 더 좋은 방식으로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_김용출 기자, 세계일보, 2022년 11월 22일자 인터뷰에서
소설 속 인물이 직접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소설은 좀 더 다정해지고 친절해졌다. 그리고 그의 소설은 마치 당부하듯, 그렇게 우리를 위로한다.
우리는 저절로 아름답다. 뭔가 쓰려고 펜을 들었다가 그대로 멈추고, 어떤 생각이 떠오르든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둔 채, 다만 우리 앞에 펼쳐지는 세계를 바라볼 때, 지금 이 순간은 완벽하다. 이게 우리에게 단 하나뿐인 세계라는 게 믿어지는가? 이것은 완벽한, 단 하나의 세계다. 이런 세계 속에서는 우리 역시 저절로 아름다워진다. 생각의 쓸모는 점점 줄어들고, 심장의 박동은 낱낱이 느껴지고, 오직 모를 뿐인데도 아무것도 잘못된 것이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_「너무나 많은 여름이」 중에서
작가가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만으로” 쓴 이 이야기들이 독자들에게 마음까지 어루만지는 따뜻한 빵 한 조각이 될 수 있기를.
Sungwoo Yoon
5.0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만들어준 소중하고 다정했던 시간과 인연들 잘못된 선택은 없다. 잘못 일어나는 일도 없다. 그러므로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좋아하 는 것을 하라.
Movie is my Life
3.5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좋아하는 것을 하라. 뒤로 가면 갈수록 더 좋았던 작품들. 그 중 최고는 당연히 <너무나 많은 여름이>. 역시 표제작은 이유가 있다. - 그렇게 우리는 여름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되어졌다.
은갈치
3.5
p 18 내가 외로울 때, 상관없는 사람은 몰라. 내가 외로울 때, 친구들은 웃어 P 34 1969년 여름도 지나갔고, 1984년 여름도 지나갔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변해갔다. 그럼에도 그 레코드판은 그 시절의상태 그대로, 조금도 훼손되지 않은 노래를 들려주고 있었다. 그 노래를 들으니 지난 시절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이렇게 빨리 나이가 들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의 마음은조금씩 무너졌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 지금, 나는 이십대초반의 나에게 괜찮다고, 그렇게 바뀌어가고, 마음이 무너져도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p 255 이게 우리에게 단 하나뿐인 세계라는 게 믿어지는가? 이것은 완벽한, 단 하나의 세계다. 이런 세계 속에서는 우리 역시 저절로 아름다워진다. 생각의쓸모는 점점 줄어들고, 심장의 박동은 낱낱이 느껴지고, 오직 모를 뿐인데도 아무것도 잘못된 것이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거기 앞에 있다거나 막 손을 스쳤다거나. 하지만 아무리 자세히 살펴봐도 내 눈에는 안 보이는데, 엄마가 손을 뻗어 뽑아내면 네잎클로버였다. 그때마다 나는 엄마의 얼굴을 바라봤는데, 네잎클로버를 뽑을 때마다 엄마의 얼굴이 달라졌다. 물론내 마음이 달라져서 그랬겠지만, 엄마가 정말 멋진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네잎클로버를 그렇게 잘 찾아낼까. 내 기억을 통틀어 그날의 엄마가 제일 뽐내는 엄마였다. 미신대로라면 행운으로 가득했어야 할 사람. 하지만 그날 찾은 네잎클로버는 모두 내 몫이었다. 엄마에게받은 네잎클로버들을 화단에 가지런히 놓고 보니 마치 내가 찾은 것인 양 뿌듯했다. - 너무나 많은 여름이 - 문득 그때 왜 울었는지 이유를 알 것 같다. 누군가 아이들만따로 단체 사진을 찍어주자고 한 모양이었다. 나보다 나이가많고 어른들 말을 잘 알아듣는 아이들이 잔디밭 가장자리에 줄지어 앉아 어깨동무를 해가며 포즈를 잡는 동안, 나는 그들의앞쪽 보도에 따로 떨어져나와 울고 있었다. 왜 거기에 낯선 아이들과 모여 있어야 하는지, 무엇보다 왜 엄마와 떨어져야 하는지 나는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해도달래지지 않았을 것이다 - 너무나 많은 여름이 - 32
김벼리
3.5
여전히 잘도 우는구나, 엉엉. 김연수는
수정
3.0
읽을 땐 좋았는데... 단편(보다는 조각글에 가깝긴 함)인 것을 감안해도 각자의 색이 너무 옅고, 모두가 지나치게 비슷한 채도와 명도를 가진 채 독립성 없이 한 덩어리로 얼기설기 엉겨붙은 느낌이라 크게 인상깊은 것이 없다. 그래도 개중 좋았다고 기억나는 것을 꼽자면 <나와 같은 빛을 보니?> 와 표제작 <너무도 많은 여름이>. 너무 많은 이야기가 머릿속을 맴돌다 보니 앉은 자리에서 다 읽는 것은 비추천. 머리가 아프다. 본디 낭독 목적으로 쓰인 단편들이라는데, 그래서인지 읽는 것보다 듣는 게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 그 마음을 모두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발밑에 광부들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광부들을 존재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 속에서 저는 여전히 아내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거기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의 마음이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습니다. - "멀리 있는 것은 작아. 가까운 것은 크고. 이게 원근법의 원리지. 이게 뭘 뜻하는지 아는 사람?" 그녀가 학생들에게 물었다. 대학교 수업에서 원근법이라니, 다들 시큰둥한 반응이었는데 지훈이 손을 들었다. "보는 사람의 눈의 위치와 관련이 있는 거 아닐까요?" "그래, 우리의 위치가 모든 걸 결정해. 우리가 감각하는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크거나 절대적으로 작은 것이 없어. 멀고 가까운 것만 있는 거야. 그러니 어떤 대상의 크기는 우리가 어디에 있느나에 달려 있어. 그 위치가 우리의 의지를 뜻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우리 위치에 따라 얼마든지 작게 만들어버릴 수 있어. 그러다가 아주 멀어지면 어떻게 되지?" "소실점으로 사라집니다." 지훈이 대답했다. 우리가 바라보는 물리적 세계에는 그런 소실점들이 한두 개가 아니지. 지금도 수많은 것들이 그 소실점으로 사라지고 있어. 이게 우리가 사는 물리적 세계의 참모습이야. 그럼 그 사라지는 것들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뭘까?" - 난 당신이 나와 같은 방향으로 서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나는 당신을 생각한다. 이제 당신도 빛을 향해 서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같은 방항을 향하고 있습니다. 나와 같은 빛을 보니?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래서 카오리는 빛 쪽으로, 태양 쪽으로 향하려고 한다. 할머니도 빛을 향해 태양을 향한다. 다음 우리는 지금 연결한다. - 불운과 불행의 차이는 무엇일까? 불운은 불가항력적으로 일어난다. 먼 훗날이 아니라 지금, 다른 사람이 아니라 미야노가 병에 걸리게 된건 불운이다. 하지만 그 이유를 운명이나 팔자 같은 자기 바깥의 이야기에서 찾으면 불행이 된다. 그래서 불운은 점, 불행은 선이라고 이소노는 말한다. 불운은 우연히 찾아오는 것이라 인생의 어느 지점에 위치시키느냐에 따라 불행으로도, 재밌는 에피소드로도, 대수롭지 않은 일로도 여길 수 있다는 것이다.
lupang2003
3.0
익숙하고 친근한 이야기로, 읽는 이로 하여금 경계를 풀게 하고, 너무 독하지도 않은, 너무 밍밍하지도 않은, 그래서 오래 남는 김연수표 치유의 문장들.
최은규
4.5
언젠가 시각장애의 본질은 보지 못한다는 게 아니라 보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라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는데 나이듦의 본질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감각능력이 점점 떨어지는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타인의 감각 대상에서 멀어진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감각 대상에서 멀어지면 모든 존재는 사라지게 되어 있었다. 풍화에 대하여, 136p
들숨
4.0
여름으로만 되어있지는 않지만 여름 휴가지에서 몽롱하게 읽기 좋은 조그마한 이야기들. 어떤 이야기들은 다음과 그 전이 궁금해서 길게 만나고 싶었다. 함께 들을 수 있는 플레이리스트가 있어서 오감으로 읽는 기분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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