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세계의 ‘0년=1945년’을 주축으로 풀어낸 전후戰後의 인류문명사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선 뭇사람의 눈물겨운 ‘세상물정의 역사학’
1945년이라는 한 해를 대상으로 세계사를 써내려간 독특한 역사서이자 논픽션 다큐멘터리가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다. 이안 부루마의 『0년』(원제 Year Zero)이 그것이다.
‘현대세계를 이해하는 데 창문’ 격인 이 책은 “전후 1945년에 대한 매우 인간적인 역사”로, 현대의 많은 성취와 상처가 응징-보복-고통-치유로 이어진 ‘0년(1945년)’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을 다면적이고도 흥미롭게 풀어낸다.
이 책은 “국가가 아닌 인간에 대해 집중하면서 승리와 패배, 혼돈과 수모의 결정적 해에 대한 뛰어난 재현”을 이뤄내며 “20세기 결정적 연도의 공포와 희망, 앞으로 다가올 문제의 근원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생생한 묘사, 훌륭한 구성과 문체가 합쳐져서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저작”이라는 평을 받았다. 『뉴욕타임스 북리뷰』 ‘2013년 주목할 만한 도서’에 뽑혔고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독일, 일본, 중국, 브라질 등 여러 국가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원래 ‘0년’은 없다. 기원전과 기원후를 나누는 ‘예수 탄생’은 ‘서기 1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0년』의 저자는 1945년이 ‘0년(원년)’이라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로 현대세계가 탄생했기에 그렇다. ‘0년=1945년’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인류 문명을 새로 재건하기 시작한 기념비적인 해로, 글로벌 차원의 세계체제 전환이 일어난 때이기도 하다.
이 책은 저자의 학문과 활동 이력답게 전 세계적 시각에서 균형을 잡으며 ‘동시대사 역사서’를 기술해나간 것이 특징이다. 더욱이 엄청난 양의 실증 자료는 주로 각종 사료와 사병 및 일반인의 증언, 『베를린의 한 여인』이라는 익명 여성의 체험기, 나가이 가후와 노사카 아키유키의 소설, 오즈 야스지로의 작품, 사가구치 안고의 일기, 보부아르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회고록 등으로 이뤄져 권력자의 역사가 아닌 역사서임을 입증하고 있다.
해방 콤플렉스, 환호, 기아와 보복, 성적 해방, 매국노 처벌 등 1945년의 퍼레이드
0년의 이야기는 한 장의 사진에서 출발한다. ‘나치 지옥의 불구덩이’가 유럽을 덮칠 때 네덜란드에서 독일로 끌려갔다가 종전 직후 연합국의 폭격과 기아, 소련 병사에게 처형될 뻔한 봉변을 당했으나 영어를 아는 러시아인 사관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남아 귀향한 저자의 아버지가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찍은 사진…… 그것은 단연코 특별한 게 아니며 전 세계의 뭇 사람이 겪은 전쟁 체험이었다. 아버지의 개인사에 대한 저자의 연민은 ‘1945년의 세계사’에 대한 지적 탐구의 열정이 됐고 세계적 변혁에 대한 공시적, 국제적인 관점으로 뻗어나갔다. 현대 문명과 폐허의 상처가 이 운명적인 해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걸 파헤치는 이 책은 저자 아버지의 개인사적 휴먼 드라마에서 시작하지만 ‘전후戰後의 세계사’로 뻗어나간다.
저자는 종전 뒤에 따라온 해방 콤플렉스, 기아와 보복의 만연, 성적 해방, 귀향, 매국노 처벌, 인민재판식 숙청, 전범 재판의 불완전한 정의, 평화와 인권에 대한 희망, 야만의 문명화 등과 같은 결정적 주제들을 비범하게 다뤄나간다. 히틀러 제3제국의 인종말살 정책과 일본 천황제 파시즘의 태평양전쟁, 그리고 미국의 승전으로 이어지는 거대 서사에만 머물지 않는다. 승전국의 행패와 패전국 국민이 겪었던 고난까지, 세계인의 삶의 다양한 층위에 영향을 미친 ‘1945년의 여파’를 세세하게 묘사한다. 전쟁과 전후의 주역은 히틀러도 처칠도 루스벨트도 스탈린도 김일성도 이승만도 히로히토도 아니고 바로 혹독하고 참담한 꼴을 당한 동시대인 모두였다는 사실을, 이것이 과연 인간인가라는 질문을 응시하는 용기로 역사의 보편성과 개별성을 겸비한 ‘전후’의 기억을 되살려낸다.
전쟁은 끝났지만 계속되는 살육
나치가 자행한 ‘홀로코스트’ 수용소를 해방시킨 연합군 장교의 발아래서, 엉덩이를 들 힘조차 없어 그 자리에서 대변을 봐야 했던 유대인 여성, 재생산을 위해 문란한 성행위에 본능적으로 집착했던 유대인 생존자들, 폐허의 도시에서 돈 몇 푼과 담배를 쥐여주는 군인들 대상으로 몸을 팔았던 ‘폐허의 생쥐’ 베를린 성매매 여성들, 일본군 공창의 성노예가 되어버린 한국 여성들, 바닥이나 급조한 매춘굴의 홀에서 매춘을 해야 했던 일본 여성들……. 현대세계의 등장에는 사악한 권력 투쟁이 뒤따랐다. 스탈린에 의한 유럽의 분단은 전쟁이 남긴 가장 지독한 상처였다. 세계의 거대 도시들이 폐허가 됐고, 인구는 대량 살육당했으며, 뿔뿔이 흩어지고 기아에 허덕였다. 가혹한 보복이 대규모로 가해졌고, 보복을 위한 명분이 쌓이면서 훨씬 더한 공포가 예고됐다. 연합군도 점령지 여성을 성폭행했다.
유럽에서는 5월에, 아시아·태평양은 8월에 전쟁은 끝난다. 하지만 그 뒤에도 막대한 숫자의 인간이 살해되었다. 불결한 상태에서 창궐한 전염병과 ‘기아’에 의해 죽은 목숨도 있지만 ‘보복’으로 생을 잃은 사람들도 있었다. “보복하는 데 가장 열성적인 사람들이라고 해서 전시에 걸출하게 용기 있는 행동을 했던 자들도 아니었다. 피점령국이 해방되자 모든 남자는 자신이 레지스탕스 일원이었다고 주장하거나, 새로 획득한 완장을 찬 채 (영국제) 스텐 경기관총을 들고는 배신자와 나쁜 여자들을 사냥하는 영웅인 척하면서 으스대며 걸어다녔다. 복수는 위험한 시절에는 과감히 떨쳐 일어나지 못했던 데 대한 죄책감을 덮는 일종의 방편”이었다.
동족에 대한 경멸, 부의 격차와 인종주의로 인한 악순환
독일과 일본 전쟁포로는 국가적 패배라는 사실만으로도 버거웠을 테지만 동족의 경멸, 증오와 맞닥뜨려야 했다. 재앙을 초래한 전쟁의 책임이 있다는 것, 오만한 전사로 국가 위에 군림하더니 비굴한 패자로 돌아왔다는 냉대와 무시의 대상이 되었다. 평화가 찾아오자 사람들은 군인들이 전시 폭력에서 범죄로 신속히 갈아타는 것을 목격하면서 제국 군대에 대한 자부심은 더욱 손상되었다.
대중의 분노는 불평등하게도 ‘매춘 협력’ 혐의로 고발된 여성들에 집중되었다. 사실 이 여성들에 대하여 “눈치 없고, 이기적이며, 외설적이며 모욕적”이라고 비난할 순 있어도 이는 엄연히 반역죄와는 달랐음에도 이들 여성은 “국가적으로 사기를 떨어뜨린 자로 가치 없다”며 유죄를 선고받고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적과 동침하는 것은 충분히 나쁘지만, 남들보다 잘사는 것은 더 큰 범죄였다. 만주와 유럽에서 소련 적군은 민간인 약탈, 성폭력 등 최악의 행동을 해도 된다는 분명한 지시를 받았다. 부富의 격차와 인종주의가 서로 적대적인 선전·선동을 강화하는 악순환을 낳았고, 이는 독일에서 소련의 행동을 특별히 잔혹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소련 군인에게 성폭행당할 위험이 중단된 것은 1947년 군대가 기지에만 머물게 된 뒤였다.
왜 이따금 피의 복수가 히틀러의 주요 피해자를 대상으로 행해졌는지?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마저 금이 갔기 때문이다. 전쟁은 끝나고 나치는 물러났지만, 귀향한 유대인들은 위협받았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폴란드인들은 다른 많은 유럽인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받았던 고통을 훨씬 더 크겤 고통받은 사람들에게 풀려고 했다. 1000명 이상의 유대인이 1945년 여름과 1946년 사이 폴란드에서 살해되었다.
반反독일 폭력은 비도덕적인 인사들로 급조된 민간 무장조직이 저질렀다. 강제수용소를 운영하고 죄수들을 고문, 무작위로 죽였으며, 아무 이유 없이 죄수들을 공개 비판대에 세웠다. 피에 대한 욕망은 물질적이면서 계급적인 질투로 인해 더 거세게 타올랐다. 교사나 교수, 사업가 그리고 기타 상위 부르주아 계급이 인기 있는 목표물이었다.
한편 프랑스 드골의 경우 전쟁 전의 엘리트에게 최소한의 타격만 가하는 방식으로 전후 처리를 했다. 사업가와 재정가, 법률가, 교수, 의사, 관료의 전문 지식과 기술이 필요했다. 페
이동진 평론가
4.5
현대의 세계체제를 만든 원년이라고 할 수 있는 1945년의 세계사적 격변을 다양한 국가의 수많은 사례들을 넘나들며 미시적으로 생생하게 거시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서술한다. (난이도 중)
샌드
4.0
방대한 이야기를 건드리면서 스스로 수습하지 못하는 책이 있는 반면 이 책은 크고 넓은 소재의 책만이 할 수 있을 것을 탁월하게 다룹니다. 거시사를 다루는 책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제겐 아무래도 기준점을 어디에 둘 것인가인데, 이 책은 제목에서처럼 특정한 연도를 0년으로 삼고 전후 좌우 사방으로 이야기를 뻗어 나가면서 마치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이야기와 이야기를 엮는데 그게 굉장히 방대한 분량이라 어려울텐데도 약점을 만들지 않습니다. 하드 커버라 두껍기도 했고 다른 책에 비해선 글자가 아주 약간 작고 촘촘하게 나온 책인데다가 제가 잘 모르는 세계사라 이걸 완독할 수나 있으려나 생각했었는데, 촘촘하게 짜여 있으면서도 거대한 그물망의 이야기 속에서 깊게 몰입해 읽었습니다.
heyyun
4.0
전쟁 끝나면 전쟁끝! 이러는 게 아닌데...... 아무 생각이 없었다. 전쟁이 남긴 건 너무 많았고 그건 아직까지 우리 삶에..
권순범
4.5
광기 어린 파괴가 전체주의의 이름으로 일어났든 자유나 민주주의와 같은 신성한 이름으로 일어났든 죽은 이나 고아, 노숙자에게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 마하트마 간디
이진우
5.0
(원서 독) satirical, immersive, and witty throughout. The author constantly reminds the reader a single truth: there is no perfect victim or attacker-we are inevitably both in the aftermath of war.
한재상
4.0
되돌아봐야 하는 건 전쟁의 참상이 아닌 전쟁이 남긴 상흔
EunjiLee
4.0
이차 세계대전에 대한 실제 갈등들을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 입장에서도 볼 수 있도록 다각도로 제시해주었다.
김준오
3.5
1945년, 2차 대전 종전의 여파로 유럽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여주어 지금의 국제관계와 현대사회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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