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곳을 돌고 돌아 도착한 최후의 지점
윤회환생이라는 굴레에 드리운 종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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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일본 작가
국내 초역으로 베일을 벗는 미시마 유키오 최고의 걸작
윤회의 그림자를 쫓던 혼다 앞에 드리운 종말
‘풍요의 바다’ 시리즈 마지막 이야기
일본 문학 애호가들 사이에서 전설로 회자되는 소설, 미시마 유키오의 ‘풍요의 바다’ 4부작의 마지막 권 『천인오쇠』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어 ‘풍요의 바다’ 4부작 한국어판이 마침내 완역되었다. ‘풍요의 바다’ 4부작( 『봄눈』, 『달리는 말』, 『새벽의 사원』, 『천인오쇠』)은 메이지 시대 말기부터 1975년까지를 아우르는, 원고지 약 6000매 분량의 대작이다. 작가는 환생을 거듭하는 한 영혼과 그를 추적하는 인식자의 궤적을 이어지는 네 편의 장편 소설로 따라가며 20세기 일본의 파노라마를 펼쳐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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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몇백 번째, 몇만 번째, 몇억 번째 환생과
혼다는 어딘가에서 또다시 만날지도 모른다.”
어느덧 노년이 된 혼다 시게쿠니 앞에 나타난 소년 도루,
그의 옆구리에는 역시나 세 개의 검은 점이 새겨져 있다
윤회환생의 본질을 문학적으로 그린 미시마 유키오의 유작
일생에 걸쳐 환생자들의 그림자를 쫓아 온 혼다 시게쿠니는 노년에 접어 들어 『새벽의 사원』에서 처음 등장했던 히사마쓰 게이코와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며 부유한 노후를 즐기고 있다.
혼다는 천인이 강림했다고 전해지는 해안을 거닐다가 시미즈항의 데이코쿠 신호 통신소를 발견한다. 얼마 후 게이코와 함께 이곳에 들른 혼다는 그곳에서 언 듯이 창백한 얼굴의 열여섯 살의 도루를 만난다. 혼다는 도루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소년 안에 자신과 똑같은 자의식의 모형이 있음을 간파한다. ‘가장 추한 기구.’ 과연 마음이 차갑고 사랑도, 눈물도 없는 아름다운 얼굴. 혼다는 도루의 옆구리에서 환생자의 징표인 세 개의 점을 발견하고 도루를 양자로 삼는다.
혼다는 도루가 세상과 보조를 맞추어 천인의 날개를 숨기고 살아갈 수 있도록 갖가지 교육에 치밀하게 힘쓰지만 도루는 점차 악마적인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혼다가 정해 준 약혼자를 교묘하게 괴롭혀 파혼으로 이끌고 팔십 대에 접어든 혼다에게 부지깽이를 휘두른다. 아무렇지 않게 ‘노인네가 되어 필요없다.’는 둥 모욕을 서슴지 않는다. 혼다는 도루의 횡포를 두려워하면서도 “남은 반년만 참으면 돼.” 하며 스물한 살이 되기 전에 도루가 죽기를 꿈꾼다. 하지만 동시에 만약 도루가 가짜라면 자신이 그 생을 따라잡지 못하고 조만간 노쇠해 죽을지 모른다는 불길함을 느낀다.
한편 혼다는 육십 년 만에 드디어, 죽음을 각오하고 월수사의 주지가 된 여든세 살의 사토코를 만난다. 그리고 극도의 적막에 휩싸이는데…….
『천인오쇠』은 미시마 유키오의 유작이자 최고의 대작이 된 4부작 ‘풍요의 바다’ 마지막 권이다. 독보적 탐미주의와 파괴적인 성향, 냉철한 지성 등 미시마 유키오의 정수가 오롯이 닮긴 유작 ‘풍요의 바다’, 그 대장정의 끝이 지금 여기에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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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삶과 세계에 대해 느끼고 생각해 온 모든 것을 여기에 담았다. - 미시마 유키오
전후 일본의 가장 문제적인 작가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완성한 혼신의 대작
1970년 11월 25일, 미시마 유키오는 오랫동안 매달렸던 소설을 마침내 탈고했다. 그가 출판사에 건넨 원고의 마지막 줄에는 ‘『천인오쇠』 끝. 1970년 11월 25일’이라는 부기가 달려 있었다. 이 날짜가 가리키는 것은 소설이 완결된 날이자 작가 자신의 기일이 된 날이었다. 향년 45세의 일이었다.
미시마가 자신의 생과 함께 마감한 작품은 ‘풍요의 바다’ 4부작의 마지막 권이었다. 1965년 『봄눈』 연재를 개시해 1970년 『천인오쇠』로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5년간 그는 이 소설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풍요의 바다’ 4부작의 배경은 메이지 시대 말기부터 1975년까지로, 미시마의 생애(1925~1970)는 그 한복판에 정확히 걸쳐져 있다. 그가 자신의 시대 위에 소설 속 시대를 겹쳐 올리며 묘출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풍요의 바다’ 4부작은 11세기 일본 산문 문학인 『하마마쓰 중납언 이야기(浜松中納言物語)』를 모티프로 한 연작 소설이다. 윤회환생을 소재로 한 ‘모노가타리’의 구성을 순문학 장편에 도입한 것은 당시 파격적인 시도였다. ‘풍요의 바다’ 1권의 주인공은 2권, 3권, 4권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환생해 다른 시대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시리즈 전체에 모두 등장하는 인물 혼다 시게쿠니는 후작가의 후계자, 정치에 빠져든 열혈 청년, 타이의 공주, 사악한 고아라는 네 개의 환생한 자아를 연결하는 고리로, 이들 모두를 가까이에서 지켜본다.
미시마 유키오는 이 네 자아에 자신의 정체성을 나누어 녹여내고, 궁극적으로는 인식자 혼다를 통해 자신을 대변하고자 했다. 시리즈 마지막 권에서 노인이 된 혼다는 그간의 모든 일들이 실재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궁극의 허무에 도달한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이르렀다.’ 혼다의 이 깨달음을 최후의 문학적 전언으로 남기고 미시마 유키오는 목숨을 끊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그가 연출해 보인 정치적 쇼보다 더 그의 진실에 가까운 것이 아니었을까.
• 이 작품은 절대적인 단 한 번의 인생이라는 것, 그것이 결국에는 유식론 철학의 상대주의 속에 녹아 들어 모두 열반에 든다는 소설입니다. — 미시마 유키오
• 이런 시대를 관통하는 명작, 비길 데 없는 걸작을 탄생시킨 미시마 군과 동시대인이라는 행복을 축하하고 싶다. 미시마의 찬란한 재능은 이 작품에서 위험할 정도로 격정적인 정열로 순수하게 승화되어 있다. 이 새롭고 운명적인 고전은 아마도 국가와 시대, 논평을 넘어 살아있을 것이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
풍요의 바다 4부작
1권 봄눈(春の雪)
2권 달리는 말(奔馬)
3권 새벽의 사원(暁の寺)
4권 천인오쇠(天人五衰)
진태
3.0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어도 이건 아니지
안태준
5.0
끝 모르듯 찬란하게 펼쳐지던 생도 죽음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순간 그동안 가꿔왔던 삶의 넓이와 부피와 무게가 마치 누군가 닥달하고 재촉하듯 한없이 어그러지고 비좁아져 결국 단 하나의 점이 되어 소멸한다. 이처럼 죽음은 예상하더라도 그 속도가 갑작스럽고, 대비하더라도 그 기세에 혀를 내둘 수밖에 없다. 죽음은 끝내 삶을 정복한다. 죽음은 생에 내재하는 부정이자, 무엇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부정이다. 미시마 유키오 만년의 걸작 ‘풍요의 바다’ 시리즈 그 마지막 이야기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제목 ‘천인오쇠’는 천인(천계의 중생)이 쇠하는 다섯 가지 징조를 뜻한다. 그 징조가 나타나는 순간부터 천인의 쇠는 어떻게 해도 막을 수 없게 된다. 지상과 하늘을 오가는 천인에게 긴박하고 처절하면서도 무력한 후반전, 죽음의 습격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천인은 과연 누구일까. 제목이 가진 꺼림칙하고 불길한 뜻과는 다르게 소설 초반부는 시원시원한 바다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1910년대부터 1975년까지가 배경인 시리즈 내내 세계(혹은 역사)의 ‘인식자‘ 혼다 시게쿠니 앞에 나타났던 물의 흐름(윤회환생을 비롯해 인간계를 구성 방식 자체를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는데, 기요아키 저택의 강섬[1권 <봄눈>], 이사오의 환생의 증표를 목격한 미와산의 폭포[2권 <달리는 말>], 인도 아잔타 석굴에서 본 거대한 폭포[3권 <새벽의 사원>]까지)이 마지막 4권 <천인오쇠>에 이르러 물의 총체인 ‘바다’, 시리즈의 제목이기도 한 ‘풍요의 바다’로 확장된 거라고 볼 수 있다. 폭포의 저 너머, 인간은 도달할 수 없는, 계속해서 신비로운 물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그곳이 이제는 인간이 볼 수 있는 시야의 극한인 수평선으로 변모한 것이다. 또한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바다란 혼다가 기요아키의 환생자들로 윤회 현상을 목격하고 수많은 불교 이론에 심취하면서 이룩한, 그 어떤 인간도 이르기 힘든 경지, 총괄적인 인식의 자아를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다. 혼다는 2권 <달리는 말>에선 정치 혁명을 꿰하던 청년 이사오를 통해 윤회환생을 처음 겪었고, 3권 <새벽의 사원>에서는 인도를 여행하며 바라나시 화장터의 죽음이 살아있는 듯한 풍경과 그래서 죽음에조차 무관심한 사람들을 목격하며 초이성의 실체를 깨닫고, 기요아키의 또다른 환생자 태국의 공주 잉 찬과의 만남을 통해 급작스럽게 초이성에 대한 관음의 욕망(악)에 눈 뜬 상태다. 그런데 그로부터 이십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일흔의 노인이 되어 바다를 여행하는 혼다의 눈에 데이코쿠 통신소에서 일하는 열여섯 소년 야스나가 도루가 ‘인식된다.’ 혼다가 기요아키의 죽음 후로 60년을 더 살아오면서 어둡게 농익은 인식자의 시선을 열여섯의 고아 소년은 독자적인 자의식으로 일찌감치 구축하고 있다. 등대 같은 통신소에 앉아 30배율 망원경으로 수평선에서 나타난 배의 정체를 헤아리고 배를 댈 항구를 비롯해 각종 대리점과 식당 등을 중계하는 일을 맡은 도루에게도 바다는 계속 바라보노라면 언젠가 자신을 아무도 본 적 없는 세계의 뒤편으로 데려갈 초월의 경지다. 도루는 그걸 보기 위해 이곳 통신소에 일찌감치 자기만의 방을 마련한 셈이다. 영원히 육지를 자신의 뒤에 두기로 결심한 사람처럼 인간세계의 법규나 질서, 문화나 정치 같은 것들에 등을 돌린 그는 눈으론 바다를 응시하고, 내면으론 자의식을 통제하고, 실제로는 육지에 발을 붙인 채 세상과 조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혼다는 그런 도루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부터 그의 내면을 꿰뚫는다. 도루가 너무나 자신과 닮은, 세계를 해석하는 자의식의 ‘모형’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환생의 증표, 천인의 증표라 할 수 있는 옆구리의 세 점을 우연히 보게 된 혼다는 신의 장난이 또다시 시작되었음을 깨닫는다. 혼다는 이제 이 신의 장난이 야속하지 않고 기쁘다. 육십 년 내내 세계의 변화와 역사의 흐름을 관망하던 혼다에게, 환생자를 발견해도 자신의 손으로 그들의 숙명을 막지 못했던 혼다에게 확실한 부와 성공을 거머쥔 노년에 드디어 미리 알고 있는자, 어쩌면 신의 자격이 약소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주어진 셈이므로. 혼다는 약소하지만 확실한 신의 자격을 갖춘 인간으로서, 만 스물한 살 전에 급작스럽게 죽어버리는 환생자의 운명을 막기 위해, 혹은 평범한 사회인으로 길들이기 위해, 혹은 갈수록 지루해질 노년에 하나의 유희로 삼기 위해 도루를 양자로 입양한다(그 과정에서 노년에 이르러 진정한 우정을 함께하고 있는 게이코(3권부터 등장한 인물)에게 이 기묘한 운명을 밝힌다). 3권에서 촉발된, 초이성의 실체를 관음하고 싶어하던 혼다의 욕망이 끝내 그걸 소유하고픈 욕망으로 더 어둡게 물든 것이다. 그러나 여태 독자적이었고 그 내면을 헤아릴 수가 없던, 헤아려보기도 전에 죽어버린 환생자들과 달리 이번 환생자 도루는 너무나 자신과 닮아있다. 그 점을 혼다는 유념하기로 한다. 혼다에게 간택된 도루는 이것이 자신의 주변에서 펼쳐지는 악의 구도가 아닐까 예감하지만 그걸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인간사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그 인간들이 자기한테서 보는 건 자신의 뒷모습, 그림자에게 불과하기 때문에, 거기에 베푸는 시혜, 그 오해임이 분명한 시혜가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면 냉큼 받아들여도 무방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신의 내면을 상처내지 않으면서 세상과 균형을 이루며 살아살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어기제-아름다운 미소로 표현하는 사려깊은 거부이자 동의-가 여기서 작동한 셈이기도 하고, 혼다가 간파했듯이 도루의 천성 자체가 악하기 때문이다. 도루가 혼다의 집에 양자로 들어오게 되면서 이야기의 흐름은 완전히 달라진다. 도루는 혼다의 집에 들어가 갖가지 교육을 받으며, 더이상 바다를 보며 살지 못한다는 게 못내 아쉽긴 하지만 통신소에서 광기 서린 대화를 나누던 추녀 기누에한테 오는 편지를 위로 삼으며 지내다가, 혼다가 이룩한 모든 힘이 앞으로 자신에게 주어질 거란 걸 깨달으면서 심심풀이처럼 악행을 하나둘씩 저지르기 시작한다. 가정교사 후루사와의 구취에 문득 불쾌감을 느낀 도루는 그의 정치 성향을 꿰뚫고 혼다에게 먼저 밝혀 그를 내쫓을지 말지를 두고 혼다의 고뇌를 즐겁게 지켜보는가 하면, 약혼자 모모코가 도루 자싴의 불륜 상대 나기사한테 헤어져달라는 편지를 쓰게 하고 그걸 혼다에게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약혼도 일부러 망쳐버린다(1권 <봄눈>의 기요아키는 편지로 자신이 곤경에 처하나 4권 <천인오쇠>의 도루는 편지로 상대를 곤경에 처하게 한다는 점에서 도루가 기요아키의 환생자가 아님이 미리 암시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게 혼다를 상처 입히는 재미를 느낀 도루는 이제 무력한 늙은이가 돼버린 혼다에게 직접적으로 악행을 가한다. 부지깽이를 들어 노인의 이마를 가격한다. 도루의 장악에는 혼다의 실수도 존재한다. 도루에게 장악되고 있는 자신에 대한 조소, 노년이라는 무력감, 도루가 기요아키의 환생자인지 아닌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고통스러워하다가 느닷없이 색정이 동해 숲에서 젊은이들의 은밀한 모습을 관음하던 과거의 그 습관을 되풀이하다 경찰들에게 발각되어 언론에 자신의 추한 실체가 퍼지게 된 9월 사건. 도루가 후루사와를 두고 자신을 시험했다는 것, 일부러 그 편지를 꾸미게 했다는 것까지 혼다는 알고 있었지만, 이제 혼다는 예리한 인식자가 아니라 힘 없는 늙은이, 여든 살 관음증자, 쇠할 길만 남은 늙은이일 뿐이다. 도루는 이제 완전 그를 장악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그때 게이코가 그 모든 비밀을 도루에게 밝히고 만다. 혼다가 평생에 걸쳐 목격한 윤회, 신의 말없는 장난, 알게 되면 인간사에 무관심해지고 ‘보는 자’의 오쇠를 겪게 할 그 모든 것을. 게이코는 그 모든 이아기를 밝힌 뒤 도루가 천인이 아닌 가짜라며 멸시하기까지 한다(나는 이게 이 자리에 없는 혼다에게 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윤회환생의 기세에 장악당한 도루가 그 증거인 기요아키의 꿈 일기를 읽고 불태운 뒤 자살을 시도했다가 눈이 멀게 되는-아주 충격적인 후반부는 급작스럽긴 하지만 이 소설에 고전적인 면모를 더해주는 것 같이 느껴진다. 타인에 의해 신탁이 폭로되고, 자신이 신탁의 주인공임을 증명하려다 주인공이 아닌 게 밝혀지며 자신의 존재 이유이자 유일한 긍지인 시각을 잃고 맹인으로 살게 되는 구조는 곱씹을수록 아이러니하다. 진실이 지연되면서 느끼게 되는 고통과 진실이 한꺼번에 드러나면서 느끼게 되는 고통, 어쨌거나 손에 주어진 게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두 선택뿐이라면, 게이코의 폭로도, 도루의 자살시도도 잔혹하긴 하지만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선택이긴 하다. 어쨌거나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히 드러나는 대신 스스로 밝히기를 택했고, 이제는 모든 것이 쇠할 일만 남았다. 혼다는 게이코가 도루에게 환생의 비밀을 밝혔다는 걸 알고 연을 끊고, 맹인이 되어 말이 없어진 도루와 그와 같이 사는 광인 기누에에게도 무심해진다. 온갖 것들의 쇠함을 목격하며 혼다는 불교의 윤회환생이 가진 모순점이, 인간의 자아도, 자아의 은밀한 교환인 환생도 비즈 목걸이 한 알 한 알의 배열처럼 서로 간에 유별난 차이도 근거도 없음을 알게 되는 순간 자연스레 극복된다는 걸 깨닫는다. 그것들은 나와 무관한 방식으로 존재할 뿐이다. 심연에 닿아서 획득할 수 있는 무의미, 노년에 이르러서 획득할 수 있는 어두운 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어느 날 건강검진 결과로-입원해서 수술을 해야한다는 이야길 듣고 자신에게도 진정한 끝이 왔음을 직감한다. 죽음을 앞둔 혼다에게 처음부터 갔어야 했던 단 하나의 길이 또렷하게 드러난다. <봄눈>에서 기요아키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존재,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황가에 저항하게 했던 존재, 그러나 기요아키를 거부하고 비구니가 되어 월수사에 들어간 존재, 그 당시 죽어가는 기요아키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 찾아온 자신과도 만나기를 거부했던 존재, 이제 주지스님이 된 사토코를 만나러 가는 길이. 언제까지나 인식자에 불과했던 혼다에게 이미 달의 경지(월수사라는 절의 이름에서 느껴지듯)에 이른 듯 보이는 사토코는 혼다가 목격한 그 모든 것의 증인이자 해설사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혼다가 갖은 고생을 해서 찾아간 사토코는 그 모든 일들이 정말 사실이었지 묻는다. 그렇게 물으면서, 인식자인 혼다의 경험과 해석을 거부한다. 온 생에 걸쳐 확신만을 거듭해온 생각이 그 끝에 이르러 거부당한다. 그러나 그 거부는 분개하게 만들지 않고 거꾸로 침묵하게 한다. 그 침묵은 어떤 밀도를 가진 침묵일까. 지글지글 익어가는 듯한 더위와 듣는 이를 천천히 녹이는 것 같은 매미 소리를 배경으로 정원의 풍경이 펼쳐지니, 마치 그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여겨진다. 그렇게 이야기는 끝난다… 1권에서는 사토코와 만남조차 거부당했던 걸 감안하면 4권에서 만남이 이뤄졌다는 그 사실 자체는 발전이긴 하다. 그러나 혼다는 60년 만에 사토코를 만나고서도 끝내 그 실체에 닿을 수 없었다. 결국 혼다가 겪고 감내한 그 모든 일은 ‘거부’에 닿을 운명이었다. 나는 19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결말이 거부인 것도 놀라웠지만 그 거부를 묵묵히 받아들이게 만드는 소설의 정교한 구성에도 놀랐다. 혼다의 인식과 시선과 관점이 무르익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사토코와의 재회 시점에서 환생을 증거하는 그 많은 근거들이 전부 없어진 상태인 게 놀랍기도 했다. 잉 찬의 반지도, 기요아키의 꿈 일기도. 그 많은 인물들도. 그렇게나 방대한 세계를 만들고 그것을 스스로 허무는 방식은 그야말로 예술이다. 그 허무에 장악될지, 아니면 그 허무를 음미할지는 읽는 자의 선택이다. 그러나 그 선택에 앞서 나 자신이 혼다처럼 인식에만 매혹되어 있는 건 아닐지, 체험에는 어떤 자신도 확신도 용기도 갖지 못하고서 인식으로 삶을 채우려는 건 아닐지 생각해 봐야 한다. 법의 편에 서서 판사와 변호사를 했던 혼다가 노년에 추하게 변한 것처럼, 인식은 고도화되고 무르익을수록 악에 가까워지는 게 쉽기 때문에. 인식이란 정교한 건축물은 항구처럼, 저 바다로 나아가지 못하고 저 바다에서 오는 것들을 지켜만 봐야하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이 시리즈를 ‘어두운’ 걸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름다움과 악을 연결하는 걸작. <봄눈> 이후로는 번역본 출간 시기와 읽는 속도가 맞아떨어져서 다 읽을 수 있었다. 끝이 멀다고 생각해서 천천히 따라간다는 느낌으로 시작했는데 어느새 끝이 나버려 헛헛하기도 하다. 미시마 유키오는 이 작품을 탈고하고 할복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만큼 이 작품은 그의 문학적 유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생에서 죽음으로 기우는 그의 고뇌가 소설에 가감없이 드러나 있어 너무나 생생한 한편, 소설이 아니라면 이를 수 없는 경지와 풍경을 나에게 보여주여 마음의 어둠 어딘가에 계속 자리할 것만 같은 소설이었다. 번역해주신 분들께 너무나 감사하다.
재혁짱
2.0
한 인간을 이해하는 지난한 과정 그것을 터득하고 체화하기 위해 우리는 읽는다
애솔킴
5.0
3권의 지지부진함을 만회하기 위해서 처음부터 흥미로운 설정을 보여주던 소설은 마침내 마지막 130 페이지에서 모든 문장 하나하나마다 장렬하고도 아름답게 폭발하다 마지막 장, 마지막 문구에서 지극히 정적이면서도 동시에 압도적인 결말을 선사한다. ============================= 병신같이 죽지말고 좀 더 살아서 쓰지 그랬냐? 어쩌면 미시마는 자신이 기요야키 같은, 자연이 생존을 허락치 않는 비범한 운명을 타고난 자이고, 니들 독자들은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이 시리즈의 화자인 혼다의 역할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그러니 니들은 나를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 이해의 단초라도 남겨주기 위해서 이 소설을 쓴게 아닐까? 싶다.
19thnight
4.5
그 모든 욕망과 번뇌를 거쳐 도달한 여름 한낮의 허무. 이보다 완벽한 결말은 없을 것이다.
이민혁
5.0
미시마의 문학 차력쇼의 끝
왓챠피디아안함
5.0
엔딩에서 오열함
방진우
4.5
사랑, 사명, 육체, 탐욕이라는 관념을 젊음의 조각으로 모으다. 충분히 아름답지 않은 사람만 아름다움으로 득을 본다. 육십 년을 관통해 온 무언가가 눈 오는 날 핫케이크의 맛이라는 형태로 혼다를 깨닫게 하는 것은, 인생이 인식에서는 아무것도 얻게 하지 않으며, 먼 순간적인 감각의 기쁨으로, 마치 밤에 광야에서 한 점의 모닥불 빛이 끝없는 어둠을 깨부수듯이, 적어도 빛이 있는 동안에는 삶이라는 어둠을 붕괴시킨다는 사실이다. 저속함의 가장 크고 유일한 원인은 살고 싶은 욕망이다. 잃을 명예도 체면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었던 혼다는 잃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들이 있음을 깨달았다. 고뇌가 정신적인 것인지 육체적인 것인지, 이제 혼다는 구별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정신적 굴욕과 전립선 비대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어떤 날카로운 슬픔과 폐렴의 흉통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늙음은 바로 정신과 육체 양쪽의 병이었는데, 늙음 자체가 불치병인 것은 인간 존재 자체가 불치병인 것과 같고, 게다가 그것은 어떤 존재론적 철학적 병이 아니라 우리 육체 자체가 병이며 잠재적 죽음이었다. 초조함 대신 평안이, 슬픔 대신 체념이 점점 시원하게 일어나 시간의 흐름을 견딜 수 있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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