チルドレン・アクト
The Children Act
2017 · ドラマ · イギリス, アメリカ
105分 · PG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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裁判官フィオナ(エマ・トンプソン)のもとに持ち込まれたのは、信仰から輸血を拒む青年(フィオン・ホワイトヘッド)の審判。18歳以上の成人には治療を拒否する権利があるが、彼は18歳まで数か月足りなかった。フィオナと青年は、面会を通じて不思議な絆が生まれてい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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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평론가
3.5
불꽃을 일으켜놓고도 그 빛이 두려워 뒷걸음질친 자의 기울어진 어깨.
JY
3.5
종교와 삶의 문제를 논증하는 영화라기보단 선택과 책임을 묻는 영화 관객도 질문자체에 머리싸멜 필욘 없을것같다 (적어도 이영화 안에서는 말이다) 그래서 영화도 이러한질문을 앞부분에 몰아놓고 선택까지 해버리는것이다 그 후를 말하는거고 그 바깥을 보라는 영화같다 정작 자신에 관한 선택과 책임을 회피하던 그녀가 본인이 초래한 파도에 온몸이 젖어 울부짖은 다음 어떤 선택을 하게될것인가.. 기대던 맞서던 간에 이젠 적어도 마주볼수 있지 않을 까 . 라이브톡)
이정식
4.5
영화 <칠드런 액트>는 두 사람에게 돌연 무심하게 그어진 삶의 절단선을 응시하는 영화다. 한 사람은 피오나 판사(엠마 톰슨)고, 또 한 사람은 애덤(핀 화이트헤드)이라는 청년이다. 피오나는 판사로서 매 재판마다 법적 엄밀성을 기해 최선의 판결을 내리곤 했다. 여호와의 증인 신자인 애덤은 투병 중이면서도 자신이 믿는 신앙을 지키려고 몸부림친다. 어느 날 그녀의 남편 잭은 ‘외도’를 선언하고 집을 떠나는데, 피오나는 한순간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을 이해할 겨를도 없이 애덤의 생사가 달린 재판을 맡게 된다. 여호와의 증인 교리에 의하면, 자신에게 다른 사람의 피가 섞이는 것은 부정한 것이므로 수혈을 받지 않겠다고 애덤과 부모는 선언한 것. 판사 피오나는 휴정을 선언하고, 애덤의 속마음을 듣고 싶어 직접 병원으로 향한다. 다시는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삶의 절단선이, 바로 두 사람이 마주 보는 그 장면에서 그어진다. - 이 영화의 주요 뼈대 중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그건 바로 질문(딜레마)이 아닐까. 어느 것 하나 쉽게 대답하지 못하게 만드는 질문(딜레마)을 마주하는 사람은 피오나다. 거대한 질문(딜레마) 앞에서 그녀는 무슨 말이든 대답(결정)을 해야만 하는 책임이 있다. 이 점에서 그녀의 직업이 판사라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요컨대 그녀는 ‘질문하는 사람’이 아니라, ‘결정(대답)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녀가 마주하는 질문(딜레마)이 쉽게 대답하지 못할 문제라는 점이다. 영화가 시작된 이후, 첫 번째 그녀가 맡은 재판은 하나의 신체에 두 사람의 머리가 붙어서 태어난 ‘샴쌍둥이’ 재판이다. ‘쌍둥이를 이 상태로 가만히 두면 두 사람 모두 죽지만, 수술을 하면 한 사람은 온전히 살 수 있다. 대신 다른 한 명이 죽는다. 그렇다면, 어떤 선택이 가장 옳겠는가?’ 이 질문 앞에서,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 어떤 사람은 쉽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연히 두 사람 모두 죽는 것보다 한 사람이라도 살려야 하는 게 아니냐고. 여기에 대한 반박. 그렇다면, 그 한 사람을 위해 다른 한 명이 마땅히 죽는 건 공정한 걸까?(죽는 사람은 대체 왜 그가 되어야 하는가?) 또, 생명이 그런 식으로 계량화될 수 있단 말인가. (과연 ‘두 생명’의 가치가 ‘한 생명’의 가치보다 더 높다는 말인가?) 우리는 이미 마이클 샌댈의 유명한 강의인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이런 주장이 ‘공리주의’에 토대한 생각임을 들은 적 있다. 또, 공리주의가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권리를 은밀히 소외시킨다는 것도 들은 적 있다. 여기에서 이 논의를 더 밀고 갈 생각은 없다. 도덕적으로 생각한다면, 이 문제는 어느 것도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딜레마다. 그러나 법정은 다르다. 인류의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나온 결과물인 현재의 사법 체계는 절차와 체계, 그리고 방법과 논리에 있어서 완결성에 최대한 집착한다. 그러므로 법에 있어서 저 문제는 해결하기 힘든 딜레마가 아니다. 아닌 게 아니라, 결국 그녀는 한 사람을 살리도록 수술하라는 판결을 내리면서 이렇게 말하고 재판을 종료한다. "법정은 도덕이 아니라 법을 다루는 곳입니다.” -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피오나에게는 두 층위의 삶이 있다. 공적인 삶(판사)의 영역과 사적인 삶(피오나)의 영역이다. 흥미롭게도, 두 영역에 모두 공평하게 두 가지의 질문이 던져진다. 먼저 공적인 삶(판사)의 영역에 던져진 질문. 1) 샴쌍둥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2) 수혈을 거부해서 생명이 위태로운 여호와의 증인 환자에게 수혈을 강제할 수 있을까. 이제 사적인 삶(피오나)의 영역에 던져진 질문 두 가지. 1) 홀연히 집을 떠나 외도하는 남편의 문제(그를 다시 사랑할 것인가, 이대로 헤어질 것인가) 2) 스토커처럼 자신을 쫓아다니는 애덤의 문제(그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오랜 세월 동안 법조인에게 존경을 받는 판사여서 그런가. 그녀는 언뜻 결정 내리기 어려운 두 재판을 모두 단호한 태도로 명징한 판결을 내린다. 하지만 사적인 영역에 던져진 질문 앞에서, 그녀는 어떤 답도 선뜻 내리기 주저한다. 왜 그녀는 그토록 어려운 판결은 명료하게 내리면서, 삶의 문제 앞에서는 무엇을 망설이는 걸까. - 두 층위 사이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피오나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녀의 대사를 다시 가져오는 것이 옳아 보인다. 그녀가 삶의 질문에 어떤 대답도 쉽게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삶은 법이 아니라 도덕을 다루는 장”이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며 수많은 조목으로 세밀하게 가지를 쳐나간 법 체계는 지나치게 매끈해서, 덕지덕지 붙어있는 여러 욕망들, 한 웅덩이 가득 고인 절망, 무수한 결여가 모두 모인 ‘삶의 근원적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다. 법은 광경을 조망하고, 삶은 실존의 심연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법의 대표격인 ‘판사’가 삶의 질문에서 입이 턱 막힌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 영화 속 피오나와 애덤은 무슨 관계였을까. 사랑의 관계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애덤이 일방적으로 피오나를 동경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옳은 지적 같으면서도, 어딘가 부족한 설명이다. 피오나도 애덤을 완전히 밀어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관계로 설명하는 것이 옳을까. 나는 이 둘을 ‘샴쌍둥이’ 관계로 설명하면 어떨까, 궁리했다. 사실 피오나와 애덤은 많은 부분에서 흡사하다. 삶에서 처한 조건이 그랬고, 세상을 인식하는 세계관도 비슷했다. 두 사람은 각각 신앙(여호와의 뜻)의 세계관과 이성(합리, 법)의 세계관으로 모든 세계의 선악과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나뉘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상대방에 의해 견고한 세계관이 깨어진다. - 애덤이 피오나를 극진히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동안 신앙의 세계에 갇혀 살았다고 느꼈으므로, 수혈을 허가한다는 피오나의 판결은 자신에게 새 생명을 선물해준 것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피오나는 왜 애덤에게 마음이 갔던 걸까. 사실 그녀는 애덤을 성가셔했다. 그랬던 그녀의 태도가 결정적으로 바뀐 것은 병이 다시 악화돼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애덤을 본 이후였다. 애덤에게서 무엇을 발견했길래. 어쩌면 그것에서 그녀가 목격한 것은 ‘몰락하는 애덤의 표정’이 아니었을까. - 죽음의 목전에서 애덤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 전 자유로워져요.” 이제 죽어요가 아니라, 자유로워진다는 것. 몰락하는 표정으로 그런 말을 남기고, 그는 세상을 떠난다. 샴쌍둥이 중 한 명은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애덤은 몰락하면서 피오나에게 ‘하나의 윤리’를 선물한 것이다. 지금껏 대답하지 못했던, 비로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게 만드는, 하나의 윤리. 그것은 바로 자신을 속박하는 모든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 모든 일을 자신이 주체적으로 선택한다는 것. 죽음이 아니라, 자유. 그러고 보면, 판사의 판결은 주체적이 아니라 수동적이다. 수많은 판례와 가지 쳐나간 법적 조목을 어기지 않고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랬던 피오나였으므로, 애덤에게서 그녀는 하나의 윤리(자유)를 선물받은 것이다. - 이제, 내가 왜 두 사람이 샴쌍둥이 관계 같다고 궁리하게 됐는지, 결정적인 장면을 말해야겠다. 피오나는 애덤의 몰락을 목격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온다. 뒤이어 들어온 남편 잭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흠칫 놀란다. 어두 컴컴한 곳에서, 그녀는 비에 온몸이 홀딱 젖은 채로 우두커니 서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쇼트의 쌍둥이를 이미 본 적 있다. 피오나를 만나기 위해 뉴캐슬까지 찾아온 애덤 역시 비를 홀딱 맞은 채로 멍하게 서 있었다. 두 쇼트는 모두 각 사람에게 단절선이다. 두 사람은 모두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곳으로 건너간다. 애덤은 자신이 헌신했던 여호와의 증인 신앙을 버리겠다고 말하고, 피오나는 울면서 애덤과 관련된 일을 남편 잭에게 사실대로 털어놓는다.(내내 대답을 피하던 피오나가 처음으로 잭에게 상세하게 대답하는 장면이다) 두 사람 모두 깊은 심연에 있던 그 무엇이 고요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변했다. - 두 사람의 삶에 그어진 단절선은 어디에서 출발한 걸까. 나는 그들이 ‘몰락하는 표정’을 목격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애덤은 부모님을 진정한 신앙인의 표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니 수혈을 못해서 죽는 것이, 죄를 지으며 사는 것보다 낫다는 부모님의 말씀에 아무 의심 없이 순종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수혈을 허락한다는 판결이 나자 죄를 짓는다고 비통해할 줄 알았던 부모님이 은밀히 기뻐했다고. 애덤이 목격한 그 표정은 (신앙인의 입장에서) 도무지 이해되기 어려운, ‘(신앙인의) 몰락의 표정’이다. 피오나 역시 몰락하는 애덤의 표정을 마주 봤다. 그들은 몰락하면서 이 세계의 완강한 일각을 함께 침몰시킨다. 그 순간 우리는 잠시 휘청이고, 가치의 지표가 바뀐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질문을 잉태한다. ‘어떤 삶이 진실하고 아름다운 삶인가’. 내내 수동적이던 두 사람의 삶의 태도에 균열을 가하는 질문이다. 요컨대 몰락은 목격자에게 하나의 윤리를 쥐어준다. 이제 목격자는 하나의 윤리를 선물 받았다. - 이제 나는 또 다른 목격자가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애덤과 피오나의 몰락을 같은 자리에서 다 함께 목격한 또 한 사람, 바로 우리 각자. 몰락의 목격자는 생명의 종말에서 다시 또 다른 생명의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누군가의 파국으로부터, ‘진실하고 아름다운 삶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탄생한다. 그질문이 다가왔을 때, 우리가 일평생 움켜쥐었던 것이 허탈하게 바스라지기도 하고, 아주 고요하게 침몰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럼에도 나아가야한다. 딱히 우리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것 밖에 방법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환영처럼 일렁이거나 혹은 그마저도 단번에 파괴된다 하더라도, 새벽 어스름의 서늘함을 통과해 나가야 한다. 비에 젖은 채로 우두커니 서있던 애덤과 피오나의 얼굴은 ‘몰락 이후의 첫번째 표정’(신형철)이다. 그러니, 목격자는 이제 자신의 지표를 수정할 준비를 하라. 견고한 구속을 깨트릴 준비를 하라. 이것은 당신을 위한 몰락이니까.
영화고독발버둥치며본다
3.0
강변의 들판에 내 사랑과 나는 서 있었지 기울어진 내 어깨에(...) 그녀가 눈처럼 흰 손을 얹었네 강둑에 풀이 자라듯 인생을 편히 받아들이라고 그녀는 말했지 하지만 나는 젊고 어리석었기에 이제야 눈물 흘리네 예이츠의 시 [버드나무 정원을 지나] . . . . ps.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낯섦과 거부감때문에 시놉시스만 보고서 신앙에 대한 믿음이 옳고 그름을 묻는 영화라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왓챠의 JY님 말처럼 신앙 이전에 자신의 선택에 따른 그 결과를 스스로 책임질수 있는가 라는 전제를 묻는 영화였습니다. . ps. 무덤덤하면서도 그녀의 감정선을 포착해내는 카메라가 마음에 듭니다. 다만 침착함이 과했는지 고의로 감정선을 건드리며 이야기 전개를 위해 아교를 맞추려드는 연출이 관객을 감정적으로 동요하게 만들기보단 작위적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 ps. 남편의 마지막 질문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습니다.(원작에서는 종교적인 색체가 드러나는 시가 나오지만, 영화에서는 그 부분을 넣지 않았다고 합니다. 좋은 선택입니다.)
𝔽.𝕃.𝔽
2.5
ネタバレがあります!!
차지훈
3.5
'잘만든 듯 못만든 작품' 딜레마적인 상황을 던져놓고 무엇을 따를 것인가 생각하게끔 하는 듯 하더니 답을 갑자기 던지고 그 후에 비약적인 드라이브를 해버린다. 때에 맞춰 훌륭한 음악 배치는 마음에 들었지만 어떠한 주제를 놓고 왈가왈부하기엔 너무 부실하고 비약적인 부분이 많다. 엠마 톰슨의 직업적인 고충을 좀 더 추가하였거나 백혈병 소년의 가정 생활, 성장 배경등을 좀만 더 친절하게 배치하였더라면 사실상 이런 고민할 필요없이 2019 개봉작 최고 작품 중 하나로 삼아도 부족하지 않을 듯 싶다. 탁월한 몰입감과 아쉬움을 넘나들며 관객들에게 다가왔지만, 상호 쌍방의 소통은 거부한 듯한 작품.
뚱이에요
2.0
당혹스러움의 연속에 '엠마 톰슨'의 명연기까지 우습게 보이기까지 한다. - '애덤 헨리'와 '피오나 메이' 이 둘의 전혀 이해할수 없는 감정선과 상식에서 벗어난 '애덤'의 행동으로 인해 벌어지는 전개를 보자니 어찌나 실소가 터지던지.
희연희
4.0
알껍질을 깨고 나와 자유의 세상에서 가장 처음 본 엄마 오리의 외면에 세상 잃은 심정. 따라갈 사람 없이 드넓게 펼쳐진, 아름답고 막막한 세상. #오리둥절 🐤🐣🐥 - 누구의 책임이겠는가. 사는 게 다 그렇지. 우리는 주어진 시간, 그 때 내 상태(바쁨의 정도나 정신연령, 마음의 깊이)에 따라 보이는 만큼의 상황에서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선택을 하며 살아갈 뿐이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을 어쩌겠는가. 그때는 몰랐는데. 삶에는 그래서 기쁨만큼 슬픔이 가득하고 떠올리면 미안함과 회한으로 대해야 하는 얼굴이 누구에게나 있다. 회한 문학의 대가 이언 매큐언이 하고 싶은 말도 그것일 거라고 혼자 생각했다. - 우리가 삶에서 사랑했지만 모르고 지나치는 디테일들, 다 지나가고 난 후 나중에야 조각 조각 발견하는 작고 아름다운 것들. 왜 그 때는 다 보이지 않을까. 빠르게 달려가며 지나치는 작은 풀잎처럼. “그녀가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나무에서 풀이 자나라는 것처럼 쉬운 일이에요. 어리고 어리석어, 나는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나의 기울어진 어깨에 흰 손을 올리고 말했습니다. 삶을 쉽게 생각해요, 둑에서 풀이 자라듯 쉬운 일이에요. 그러나 나는 어리고 어리석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눈물로 가득찼습니다” - 뜬금없이 임형주에게 감사하다. 영화의 의미를 다 축약해서 담고 있는 상징적인 노래인데 어릴 때 임형주 버전으로 듣고 너무 좋아서 가사도 외웠기 때문에 애덤이 전주만 코드 틀리게 튕길 때 부터 어떤 노래인지 알 수 있었다. ㅋㅋㅋㅋㅋ - “나의 결정이 소년에게 최선이길” 결정은 그 시점에서의 최선이지만 그것이 늘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 수는 없다. 그때의 최선을 다하지만 인생은 하나를 넣었다고 하나가 나오는 예측 가능한 게임이 아니니까. 결과적으로 긴 시간 속에서 볼 때 우리는 인생의 인과관계에 생각보다 큰 주도성이나 영향력을 가질 수 없다. 우리의 선택 자체는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지만 최종적인 결과를 주도적으로 가져갈 수는 없다. “But I was young and foolish", 우리는 언제나 뒤돌아보면 그 당시에 "어리고 어리석어" 알 수 없었을 뿐이다. - https://brunch.co.kr/@hikary051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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