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5.0간만에 5점짜리 영화를 찾았다. 서사가 부족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폴, 엘리, 애스터의 가정사는 가감없이 걷어내고 그들의 관계에 집중한 것이 좋았다. (이 점이 영화에 여운이 남고 깔끔하다고 생각한 부분이다. 자칫 이런 얘기를 넣었더라면 방황하는 청춘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초반엔 생각했다. '그래서 애스터의 반쪽은 도대체 누구야!' 영화가 끝날 때쯤 다시 생각했다. 서로가 서로의 반쪽이구나. 감독이 말하는 반쪽은 단지 '애인'에 한정된 게 아니라는 것 폴과 엘리, 폴과 엘리의 아버지, 엘리와 애스터...서로가 서로의 반쪽이 되어주고 있다. 폴은 이렇게 말한다. "난 늘 사랑은 한 가지 방식뿐이라 생각했어. 올바른 방식 하나. 하지만 더 많아.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많아." 아마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이 대사에 함축돼있을 것 같다. 아주 따뜻하고 인문학적 감성이 높은 영화.いいね544コメント0
이민허3.5그림이 망가지더라도 그 괜찮은 그림을 다시 그릴 수 있다는 걸 알아야만 해 하지만 대담한 선을 그려넣지 못한다면 그 훌륭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는 영영 모르겠지いいね342コメント1
billie5.0중력은 외로움에 대한 물질의 반응이다. . . . . 중력의 반대는 부력. 부력으로 물 위에 떠있는 두 사람. 즉, 그 순간은 서로가 외롭지않다는걸 의미하는게 아닐까.いいね215コメント5
석미인3.580년대, 성소수자의 명칭이 재정립되던 시기. 게이는 본래 긍정적 의미였지만 퀴어란 단어는 그때까지도 멸칭에 가까웠다. 그즈음 비트 세대 최고의 작가인 윌리엄 버로스의 자전 소설 '퀴어'가 출간되었는데 이는 작품이 쓰인지 30년 만의 일이었다. 정말 혼자인 사람은 아무도 없어. 누구나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일부야. 그래도 다른 사람을 보고 '너는 나의 일부'라고 설득하기란 어려운 일이야. 그러니 젠장 어쩌라는 거지? 우리 모두가 무엇의 일부라면 함께 작동할 밖에. 그렇지?" 플라톤의 향연보다는 퀴어의 이 구절로 영화는 시작되어야 했을 것이다. 누군가가 누구의 반절이 되는 일은 없을 테니. 설혹 그것이 퀴어라 하더라도 (이하 스포) 작품을 탓하고 싶진 않았지만 작동이라는 단어에 힘을 얻어 글을 보탠다. 영화 졸업의 마지막 시퀀스. 더스틴 호프만은 교회를 향해 전력으로 뛰었다. 식장에 도착해 한 층 위로 올라간 그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예식을 망치고 신부와 도망친다. 그들이 잡아탄 버스의 승객들은 모두 나이 든 사람들. 젊은 그 둘을 그저 황망하게 바라본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대담하게 배역을 바꿔 끼우고 기존의 방식을 뒤집는다. 클리셰가 레퍼런스로 바뀌어 작동하는 지점. 더스틴 호프만은 동양 여성이, 뜀박질은, 떠나지 못하는 이가 대신한다. 신부는 함께 오지 않았다. 나이 든 기차의 승객들을 하나하나 비춰주지만 그녀의 새 출발에는 무심할 뿐이다. 영화에서 영화를 말하던 부분. 훌륭한 그림은 대담한 다섯 개의 선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 바꿔 덧칠한 그림에는 덧대지 못한 기존의 선이 있다. 엘리가 애스터에게 한 고백의 말 ‘당신은 고전적인 골격을 가지고 있어요’ 기존의 방식을 뒤집지 못한 고전적인 선. 백인 미녀, 그녀는 상대역으로 기능했지만 스스로 존재하고 작동하지 않았다. 함께 도망가는 신부가 빠진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이 영화는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고 오래전 자신의 커밍아웃 과정에서 헤테로 백인 남사친과의 이별을 극복하려 쓴 시나리오라고 했다. 엘리와 폴은 실존의 모델이 있고 애스터는 가상의 신화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서 애스터를 걷어내면 모호했던 지점이 사라진다. 로맨스가 아닌 정확한 성장영화로 말이다. 미국의 어느 시골, 동네의 유일한 동양 여성이 기차를 타고 떠난다. 그녀는 훗날 자신의 커밍아웃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고 십수년이 흐른 후에야 겨우 다시 한번 이 영화를 만들었을 뿐이다. 우리 영화로 돌아가 그 시작을 축복하자. 수십년 전의 그 소녀를 찾아가 살갑게 이야기를 건네자. 단벌의 겨울 외투를 입고 목도리를 두른 사람에게. 겨울에서 근사한 봄의 근사치로 다가서는 사람에게. 우선 생각한 것은 그녀의 목소리. 당신은 겨울 목소리를 가졌다고. 사람이 차갑다는 뜻이 아니라 더운 숨과 따뜻한 말씨를 가졌다는 뜻이라고. 봄의 언저리에 가서 그 목소리가 더욱 화사해지길 바란다고. 한때는 모든 이야기의 끝은 희망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살다 보니 안 될 생각이었기에 많이 굽혔고 지금은 그래도 성장 영화라면 그 끝이 씩씩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엘리에게 더 따뜻한 이야기를 해주고 싶지만 가진 게 없어 한강의 소설 구절을 대신 적는다. 꼭 그이가 아니더라도 어떤 사람에게 응원이 되길 바란다. 그이가 씩씩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그 꿈 이야기가 끝났을 때 나는 무엇인가를 이해했지만 내가 이해한 것을 은희 언니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내 꿈을 듣고 이해한 것을 나에게 말하지 않은 것처럼. 그러지 마 라고 그때 말했어야 했다. 그러지 마 우리 잘못이 있다면 처음부터 결함투성이로 태어난 것뿐인걸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설계된 것뿐인걸. 존재하지 않는 괴물 같은 죄 위로 얇은 천을 씌워놓고 목숨처럼 껴안고 살아가지마. 잠못 이루지 마 악몽을 꾸지 마 누구의 비난도 믿지마. 그러나 그중 한마디 말도 나는 입 밖으로 꺼내놓지 못했다. 오래전에 단 한번 그랬던 것처럼 어깨를 꽉 안지도 손을 잡지도 않았다. 다만 은희 언니가 제 힘으로 찾아가는 곳의 여행이 그녀를 구할 거라고 믿었다. 내가 할 수 있었을 어떤 말보다 강렬한 열기와 소낙비로. 물을 머금고 생생하게 솟아오르는 열대의 꽃과 나무로.いいね191コメント4
호랑
5.0
간만에 5점짜리 영화를 찾았다. 서사가 부족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폴, 엘리, 애스터의 가정사는 가감없이 걷어내고 그들의 관계에 집중한 것이 좋았다. (이 점이 영화에 여운이 남고 깔끔하다고 생각한 부분이다. 자칫 이런 얘기를 넣었더라면 방황하는 청춘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초반엔 생각했다. '그래서 애스터의 반쪽은 도대체 누구야!' 영화가 끝날 때쯤 다시 생각했다. 서로가 서로의 반쪽이구나. 감독이 말하는 반쪽은 단지 '애인'에 한정된 게 아니라는 것 폴과 엘리, 폴과 엘리의 아버지, 엘리와 애스터...서로가 서로의 반쪽이 되어주고 있다. 폴은 이렇게 말한다. "난 늘 사랑은 한 가지 방식뿐이라 생각했어. 올바른 방식 하나. 하지만 더 많아.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많아." 아마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이 대사에 함축돼있을 것 같다. 아주 따뜻하고 인문학적 감성이 높은 영화.
JSH
4.0
🍍🦉🐛
이민허
3.5
그림이 망가지더라도 그 괜찮은 그림을 다시 그릴 수 있다는 걸 알아야만 해 하지만 대담한 선을 그려넣지 못한다면 그 훌륭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는 영영 모르겠지
햄튜브
3.5
시즌2! 시즌2!
어부
4.0
앨리 목소리 왤케 멋져..? 여성의 이야기는 여성이 다뤄야하듯 아시안 이야기는 역시 아시안에게
billie
5.0
중력은 외로움에 대한 물질의 반응이다. . . . . 중력의 반대는 부력. 부력으로 물 위에 떠있는 두 사람. 즉, 그 순간은 서로가 외롭지않다는걸 의미하는게 아닐까.
성유
3.5
사랑은 괜찮게 그린 그림을 기꺼이 망치는 거예요 훌륭한 걸 그릴 기회를 위해서
석미인
3.5
80년대, 성소수자의 명칭이 재정립되던 시기. 게이는 본래 긍정적 의미였지만 퀴어란 단어는 그때까지도 멸칭에 가까웠다. 그즈음 비트 세대 최고의 작가인 윌리엄 버로스의 자전 소설 '퀴어'가 출간되었는데 이는 작품이 쓰인지 30년 만의 일이었다. 정말 혼자인 사람은 아무도 없어. 누구나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일부야. 그래도 다른 사람을 보고 '너는 나의 일부'라고 설득하기란 어려운 일이야. 그러니 젠장 어쩌라는 거지? 우리 모두가 무엇의 일부라면 함께 작동할 밖에. 그렇지?" 플라톤의 향연보다는 퀴어의 이 구절로 영화는 시작되어야 했을 것이다. 누군가가 누구의 반절이 되는 일은 없을 테니. 설혹 그것이 퀴어라 하더라도 (이하 스포) 작품을 탓하고 싶진 않았지만 작동이라는 단어에 힘을 얻어 글을 보탠다. 영화 졸업의 마지막 시퀀스. 더스틴 호프만은 교회를 향해 전력으로 뛰었다. 식장에 도착해 한 층 위로 올라간 그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예식을 망치고 신부와 도망친다. 그들이 잡아탄 버스의 승객들은 모두 나이 든 사람들. 젊은 그 둘을 그저 황망하게 바라본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대담하게 배역을 바꿔 끼우고 기존의 방식을 뒤집는다. 클리셰가 레퍼런스로 바뀌어 작동하는 지점. 더스틴 호프만은 동양 여성이, 뜀박질은, 떠나지 못하는 이가 대신한다. 신부는 함께 오지 않았다. 나이 든 기차의 승객들을 하나하나 비춰주지만 그녀의 새 출발에는 무심할 뿐이다. 영화에서 영화를 말하던 부분. 훌륭한 그림은 대담한 다섯 개의 선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 바꿔 덧칠한 그림에는 덧대지 못한 기존의 선이 있다. 엘리가 애스터에게 한 고백의 말 ‘당신은 고전적인 골격을 가지고 있어요’ 기존의 방식을 뒤집지 못한 고전적인 선. 백인 미녀, 그녀는 상대역으로 기능했지만 스스로 존재하고 작동하지 않았다. 함께 도망가는 신부가 빠진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이 영화는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고 오래전 자신의 커밍아웃 과정에서 헤테로 백인 남사친과의 이별을 극복하려 쓴 시나리오라고 했다. 엘리와 폴은 실존의 모델이 있고 애스터는 가상의 신화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서 애스터를 걷어내면 모호했던 지점이 사라진다. 로맨스가 아닌 정확한 성장영화로 말이다. 미국의 어느 시골, 동네의 유일한 동양 여성이 기차를 타고 떠난다. 그녀는 훗날 자신의 커밍아웃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고 십수년이 흐른 후에야 겨우 다시 한번 이 영화를 만들었을 뿐이다. 우리 영화로 돌아가 그 시작을 축복하자. 수십년 전의 그 소녀를 찾아가 살갑게 이야기를 건네자. 단벌의 겨울 외투를 입고 목도리를 두른 사람에게. 겨울에서 근사한 봄의 근사치로 다가서는 사람에게. 우선 생각한 것은 그녀의 목소리. 당신은 겨울 목소리를 가졌다고. 사람이 차갑다는 뜻이 아니라 더운 숨과 따뜻한 말씨를 가졌다는 뜻이라고. 봄의 언저리에 가서 그 목소리가 더욱 화사해지길 바란다고. 한때는 모든 이야기의 끝은 희망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살다 보니 안 될 생각이었기에 많이 굽혔고 지금은 그래도 성장 영화라면 그 끝이 씩씩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엘리에게 더 따뜻한 이야기를 해주고 싶지만 가진 게 없어 한강의 소설 구절을 대신 적는다. 꼭 그이가 아니더라도 어떤 사람에게 응원이 되길 바란다. 그이가 씩씩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그 꿈 이야기가 끝났을 때 나는 무엇인가를 이해했지만 내가 이해한 것을 은희 언니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내 꿈을 듣고 이해한 것을 나에게 말하지 않은 것처럼. 그러지 마 라고 그때 말했어야 했다. 그러지 마 우리 잘못이 있다면 처음부터 결함투성이로 태어난 것뿐인걸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설계된 것뿐인걸. 존재하지 않는 괴물 같은 죄 위로 얇은 천을 씌워놓고 목숨처럼 껴안고 살아가지마. 잠못 이루지 마 악몽을 꾸지 마 누구의 비난도 믿지마. 그러나 그중 한마디 말도 나는 입 밖으로 꺼내놓지 못했다. 오래전에 단 한번 그랬던 것처럼 어깨를 꽉 안지도 손을 잡지도 않았다. 다만 은희 언니가 제 힘으로 찾아가는 곳의 여행이 그녀를 구할 거라고 믿었다. 내가 할 수 있었을 어떤 말보다 강렬한 열기와 소낙비로. 물을 머금고 생생하게 솟아오르는 열대의 꽃과 나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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