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간의 결핍과 차이와 비참이
개인적인 체험에서 타인과의 상호작용으로, 법과 제도 속으로,
누구나 아름다울 수 있는 사회적 무대로 확장되어가는 한 편의 긴 변론서
1급 지체장애인인 김원영은 지난 2010년 불굴의 의지와 희망의 상징인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야한’ 장애인, ‘나쁜’ 장애인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책을 썼다. 열다섯 살까지 방 안에만 있던 자신이 장애인학교를 거쳐 서울대 로스쿨에 진학하기까지의 개인적 서사를 바탕으로, 자신과 같은 소수자들이 세상에 등장할 수 있게 해준 용기 있는 사람들의 자유와 연대의 힘을 증언했다. 당시 스물아홉의 청년이었던 그는 책의 에필로그에서 “언젠가는 증언이 아니라 변론을 할 수 있는 삶, 조금은 더 당당하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삶, 다가오는 내 삼십대에는 그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이제 삼십대가 된 그는 연구자이자 법률가로서, 자신의 분노와 욕망을 드러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에서 ‘잘못된 삶’, ‘실격당한 인생’이라 낙인찍힌 이들의 삶을 변론하기로 했다. 그들이 자신의 출생 자체를 부정하거나 자신의 신체적, 정신적 특질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해 고통 속에 살지 않도록, 모든 존재가 존엄하고 매력적일 수 있는 증거들을 수집해 한 편의 긴 변론서를 작성했다.
인간의 존엄성은 어떻게 발견되고 구축되는가
저자는 소수자들이 삶에서 만나는 연극적인 순간들, 즉 차별과 배제, 수치와 모욕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노련하게 맞받아치고 우아하게 대응하는 태도가 놓인 딜레마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취한 이런 마음의 태도는 삶의 모든 순간을 일종의 공연(퍼포먼스)으로 만든다. 뜻밖에도 이는 자신을 모욕했던 이들, 의전을 기획하고 장애인을 동원하는 이들의 연극적인 삶과 어딘가 닮아 있다. 그러나 저자는 거짓된 연극을 집어치우라고 하기보다는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과 인류학자 김현경의 논의를 빌려와, 사람과 사람이 주고받는 연극적인 상호작용이 인간의 존엄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전개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무더운 여름날 모든 아이가 계곡으로 달려갈 때 “나 피부 관리해야 돼”라며 장애가 있는 친구 곁에 남는 한 아이와 그 연기를 이해하고 적당한 말로 친구를 보내주는 또 다른 아이가 연출하는 한 편의 무대. 저자는 이와 같은 ‘존엄을 구성하는 퍼포먼스’를 통해 홀로 고통을 감내하던 개인이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존엄한 인간으로 일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내 친구가 “피부 관리해야 돼”라고 말할 때, 나는 그가 나를 존중하기에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알고 그에게 맞장구를 쳐준다. 나의 맞장구에 그는 내가 자신을 존중함을 알고, 더더욱 나를 존중한다. 그가 나를 존중하는 모습에서 나 역시 스스로를 존중한다. 결국 나는 그가 실제로는 가고 싶어 했던 계곡으로 그를 마음 편히 보내주고, 그는 나의 자존감을 지켜주며 만화책을 건네고 떠난다. 우리는 서로가 욕망과 자존심을 가진 하나의 인격체라는 점을 깊이 인정한 상태에서 연기를 했고, 이런 퍼포먼스는 우리의 존재를 더욱 밀도 있게 만들어준다. (중략)
인간의 존엄성이 가장 극명하게 빛나는 순간은 서로가 서로의 연기를 이해하고, 상호작용하면서 서로를 존엄한 존재로 대우하는 때이다. 품격이 상대방을 적절하게 접대하는 연기에 의해 구성된다면, 존엄은 상대를 환대하고 그 환대를 다시 환대하는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 우리가 본래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서로를 대우한다기보다는 그렇게 서로를 대우할 때 비로소 존엄이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_ 69~71쪽
부모, 형제자매, 친구, 연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신이 존엄한 인간임을 확인한 소수자들은 이제 세상으로 나아간다. 변호사이자 국가인권위원회 장애차별조사관으로 일했던 저자는 법의 문지기로서 차별당하는 이들을 만나온 경험을 바탕으로, 법과 제도가 보호와 치료, 복지라는 이름으로 인간 존엄의 가장 기본적 전제인 개개인의 고유한 서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이들의 복잡하고 고유한 삶의 이야기, 배경, 몸의 경험이 무엇이든 오로지 법은 (효과적이고 강제적이지 않은) 서비스를 받고 싶다면 정신질환자로 스스로를 인정하라고 요구한다. 법의 보호와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바로 그 보호가 필요한 이유인 ‘속성’ 또는 ‘배경’ 안으로 한 사람의 인격을 온전히 구겨 넣으라는, 즉 지체장애와 발달장애 그 자체로만 존재를 쪼그라트리라는 요청이다. (중략)
헌법은 개인이 고유한 저자성을 갖기 때문에 존엄하고, 그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 자유권, 평등권,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등이 필요하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정작 그 권리 보호의 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존엄의 핵심인 저자성을 침탈당해야 하는 셈이다. _ 189쪽
나아가 저자는 그러한 고유성, 자기 삶의 이야기를 스스로 써 내려가는 저자성authorship을 보장받기 위해 ‘이동권’과 같은 새로운 권리를 발명해나간 장애인들, 소수자들의 오랜 투쟁의 역사를 서술한다.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의 존엄을 확인하고, 그것을 법과 제도에 진입시키려 노력해온 소수자들은 이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는 아름다움의 문제, ‘나는 법과 도덕, 교양, 인권 의식에 의존하지 않고도 그 자체로 매력적인 존재인가?’라는 질문 앞에 선다. 저자는 ‘초상화 그리기’라는 개념을 통해 한 사람이 자신의 신체와 정신을 온전히 지닌 채 써온 인생의 이야기를 오랜 시간 지켜봐줄 수 있는 시선이 있다면, 그런 무대가 모두에게 주어진다면 ‘실격당한’ 존재들도 아름답고 매력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티리온’ 역으로 등장하는 배우 피터 딘클리지는 연골무형성증을 가진 장애인이다. (중략) 7년이라는 시간 동안 시청자들은 티리온의 삶 전체를 따라가며 스냅사진 같은 한순간이 아니라 그의 연기가 만들어낸 오랜 시간을 캐릭터의 외모에 통합한다. 그는 이제 극 전체에서 누구보다 매력적인 캐릭터로 각인되고 있다. 물론 그런 연기 자체가 피터 딘클리지라는 배우가 자기 삶에서 구축한 ‘서사’가 구현된 결과일 것이다. 티리온의 매력은 피터 딘클리지라는 배우의 매력과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중략)
이 모든 실천은 자기를 표현하는 데 제약이 많은 사람들이 인간이라는 ‘화가’들 앞에 자기 초상화를 맡길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이렇게 그려진 초상화는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와 신념, 성향, 몸의 질량과 부피, 비율과 신체의 곡선, 색깔과 향기, 목소리를 모두 종합할 것이다. 아름다울 기회의 평등이 있다면 적어도 당신과 나의 신체도 얼마간은 아름다울 수 있다. _ 276~285쪽
정체성을 수용한다는 것: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을 위하여
로스쿨 1학년 민법 수업 시간, 저자는 수강생 가운데 유일하게 휠체어에 앉아 ‘잘못된 삶 소송’ 이야기를 접했다. 자신의 질병 또한 유전자 검사 등을 통해 미리 진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그는 부모가 자신의 출생이 손해라며 의사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장면을 상상해보았다. 성장기 내내 붙들고 있던 ‘나는 추하고 무가치하고 열등한 존재가 아닐까?’라는 질문이 ‘잘못된 삶’이라는 개념으로 수렴되는 느낌이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삶이 손해나 잘못은 아닌지, 아니라면 그 근거는 무엇인지, 자신처럼 차이와 결핍을 가진 존재가 그것을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어떤 인식과 태도가 필요한지를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 분투하는 삶을 살았다. 그 과정에서 모은 법적, 사회적, 철학적, 경험적 근거들을 엮은 것이 바로 이 책이다.
2001년 미국에서 한 청각장애인 레즈비언 커플이 5대째 청각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남성에게 정자를 기증받아 청각장애를 가진 아들 고뱅을 낳았다. 아이에게 고의로 장애를 물려준 이들의 선택은 엄청난 윤리적 논쟁을
홍지아
5.0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 것이 그 사람의 ‘삶 자체’일 땐 존경한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한테도 존경심이 인다. 얼마나 자신의 삶을 들여다 봤을까. 또 그걸 해석하기 위해 얼마나 생각해야했을까? 그 모든 시도들이 겹겹이 쌓여 쓰여진 책이다. 그래서인지 사례와 이를 뒷받침하는 논리, 배경에 깔린 감성 등 모든 요소들이 풍부하다. 읽는 내내 고개를 주억거리고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읽은 후엔 내 마음에 하나의 통각이 뾱, 튀어나온 기분이다. 이렇게 하나씩 통각이 늘어갈 때마다 나는 자주 슬프고 아프다. 그런데 그게 마냥 싫진 않다.
pizzalikesme
4.0
키가 아주 작거나 얼굴에 커다란 반점이 있는 것은 나의 책임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몸으로 태어난 것이 추하고, 존엄하지 않고, 하찮다고 여겨지는 상황에 대해서는 나도 책임을 부담한다. 나에 대한 그런 손가락질의 원인은 세상의 잘못된 평가와 위계적 질서이지만, 그에 맞서 내 존재의 존엄성과 아름다움을 선언할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 이것이 ‘정체성을 수용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취하는 실천적 태도이다. 154p
귤귤
5.0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대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돌이켜 보게 한다. 사회는 언제까지 그들의 권리를 박탈하여 고립시킬 것인가. 그들은 배려가 아닌 권리라 외친다.
김동원
5.0
피상적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하는 많은 글들과 영화들을 봤지만 이처럼 그 당위가 설득되는 글을 나는 본 적이 없다. . '내가 스스로에게 잘못된 삶이 아닌가, 실격된 인간이 아닌가를 되묻고 있는' 나, 또는 타인들에게 취약함을 수용하는 방법을, 인격체로 존엄을 갖추는 방법을, 주체와 객체로써 사랑하는 방법을 말해주는 진심어린 텍스트 . 사진에는 피사체가 필요하지만 서사에는 주인공이 필요하다. 살아오면서 장애인을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모두를 각자의 서사의 주인공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넓혀준 책 . 아래 겨우 고른 발췌 . - 나는 나의 몸과 정신의 상태를 극복할 수 없으니 몸과 정신에 따른 결과를 책임질 필요가 없고 책임질 수도 없다. 그럼에도 내 몸이 자유롭고, 존엄하고, 가치 있어야 한다는 책임을 지기로 '결단'한다. 장애로 인한 삶의 결과를 나는 책임질 수 있었다고 간주한다. 이것을 깨달을 때만이 자유로워질 수 있고, 어른이 된다는 건 바로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하잎솨
4.5
예전엔 그래도 어떤 한가지 이슈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의 명확한 한 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알면 알수록 사회의 부피가 너무 크고 방대해서 만나는 사람들 한명한명 존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결론지었다. 당신이 어떤 선택을 했고, 무슨 언어를 사용하며 어떤 외모, 어떤 성적 지향 그리고 취향을 갖고있는지 등 정체성을 이루는 요소를 존중하는것보다, 그 요소들을 가지고 써온 삶이라는 서사를 존중하는 것. 나는 절대로 모든 걸 아는 사람이 아니다.
134340
4.0
배려와 기만의 경계에서
혀녕
4.0
“장애인이나 병에 걸린 사람들이 우리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며 성금을 보내고, 구세군에 거금을 쾌척하면서도 막상 그 신체와 5분도 같이 앉아 밥을 먹지 못하고, 그 신체가 버스에 올라타는 잠깐의 시간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그 신체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를 짓는 일에 반대한다면 그 자체로 혐오이며 다른 해명이 필요하지 않다.”
Wheeyeon Kim
5.0
책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이런거구나..
더 많은 코멘트를 보려면 로그인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