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 할멈, 동경이 참 넓지 않소”
“그러게요. 여기서 잘못하다 헤어지면 평생 찾아 헤매도 못 만나겠어요”
고즈넉한 시골 마을에서 평생을 살아온 노부부는 자식들의 얼굴을 보기 위해 번화한 동경으로 향한다. 하지만 도시 생활에 익숙해진 자식들은 정작 부모에게 온전한 시간을 내주지 못한다. 의사인 장남은 바쁜 병원 일에, 미용실을 운영하는 딸은 북적이는 가게에 매여 있다. 며느리 노리코만이 유일하게 진심을 다해 노부부를 정성껏 돌본다. 낯선 도시에서 살아가는 자식들을 걱정하며 노부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Cinephile
5.0
어떻게 보면 고집스럽게도 감독은 인물 누구의 삶도 평하려 하지 않는다.영화가 그렇게 인물들을 흘려보내듯 그리는 것은, 삶의 무게를 정직히 받기에는 부족한 우리에 대한 연민일 것이다
별,
5.0
전하지 못한 진심을 "정말 아름다운 새벽이었어."라며 끝내 우두커니 혼자만의 시간으로 감내하고 침잠하는 아버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세월의 무게가 쌓일수록 점점 더 체화되는 보편적 인생사의 무상함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 함께 했던 시간은 그렇게 기억으로만 남고, 부모와 자식은 그렇게 각자의 길을 간다. 인간은 그저 유한한 시간 속에 이기적인 순간의 점을 찍으며 무한한 순환의 원을 그릴 뿐이다.
김도훈 평론가
5.0
이 영화로 지은 시의 놀라운 아름다움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컬러풀해진다.
김상지
5.0
쓸쓸한 말을 담담하게 뱉어내는 부모의 모습에서 잔인한 말을 당연하게 뱉어내는 자식의 모습에서 한 마디 한 마디가 들을수록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JE
4.0
참 기묘한 영화다. 인물들을 과도하게 분리하는 정면 클로즈업 숏/리버스 숏으로 이루어진 대화 장면을 <만춘>이나 <동경의 황혼>에서도 만나긴 했지만, <동경 이야기>에선 유독 눈에 띄었다. 류 치슈-하라 세츠코-히가시야마 치에코, 세 사람의 대화를 잡는 클로즈업 편집은 정말 기이할 정도였다. 묘하게 어긋난 시선이 위화감을 줄 뿐만 아니라 류 치슈의 느린 동작과 이상하리만치 변화 없는 (웃는) 표정, 이따금 반복하는 "그렇군(そう)"에 기계적이랄지 괜히 더 경직된 인상을 준다. 이런 부자연스러움이 대화 장면에만 그치진 않는다. 노부부가 막 동경에 도착해 자식들에게 방을 안내 받는 장면. 2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계단 쪽으로 향하는데, 이때 계단이 있음을 암시하기 위한 것인지 류 치슈의 시선이 살짝 위를 향했다가 다시 바닥을 보며 조심스레 발을 내딛는다. 그 뒤를 바짝 따르는, 부인 히가시야마 치에코 역시 놀랍도록 똑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물론 계단을 오를 때, 특히 나이 든 이에겐 어쩌면 습관적인 동작일 터라 그걸 세심히 캐치한 연기에 감탄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만 너무도 닮고 기계적인 움직임이 마음에 걸렸다. 무언가 색채도 리듬도 활력도 없는 유령의 표정과 움직임 같은 것. 그런데 노부부가 함께 있는 장면이면 더러 비슷한 인상이다. 나란히, 혹은 마주 앉은 채로 류 치슈의 시선을 따라 치에코의 고개도 돌아가는가 하면, 두 사람의 신체적 속도감이 실로 비슷해 류 치슈가 담배를 꺼내 문다거나 치에코가 부채질을 한다거나 하는 장면이 마치 하나의 행동처럼 묶여 보인다. 아타미로 여행 간 노부부가 젊은이들의 바깥 소음에 쉬이 잠을 청하지 못하는 장면에서의 부채질이나, 류 치슈가 몸을 일으키자 한 박자 늦게 치에코가 몸을 일으키는 그 리듬도 그렇다. 특히 아타미의 해변 제방 위를 함께 걷는 장면은 롱숏으로 잡혀 반짝이는 풍경과 대비돼 괜히 맞붙은 두 사람의 걸음이 ㅡ필시 아름답지만ㅡ 어색함이 더 도드라졌다. 한편 부채질 하는 행위는 반복해서 등장하는데, 식사를 하는 노부부를 위해 하라 세츠코가 느릿하게 부채질하는 숏 이후 부모의 거취를 고심하는 자식의 재바른 부채질로 이어지는 순간처럼 이따금 강조가 느껴진다. 뿐만 아니라 극 중 모든 인물이 부채질 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백주의 작가"라는 하스미 시게히코의 표현처럼 맑은 하늘과 무더위를 흑백 화면에 안착시키는 오즈의 장기에 그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술했듯 인물들, 특히 노부부의 작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행위성이 눈에 박힌 내겐 무심히 반복되는 부채질마저 그런 인상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어떤 뻣뻣함이 비단 노부부의 동작에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고, 공간과 인물을 한 눈에 또 적확하게 붙잡는 카메라의 엄밀함 자체도 그렇다. 유별난 극적 정서를 강조하지도 않고 설령 죽음에도 유난 떨지 않고 그저 삶을 떠나 보내는, 말하자면 다다미 숏마냥 일정한 눈높이의 영화건만 작위적이다 싶을 정도로 잘 짜인, 그러나 그래서 어색해 보이는 구도는 그 천연한 흐름을 거스르는 형식이 아닌가 싶으면서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엔딩까지 켜켜이 쌓이는 정서는 <만춘> 때만큼이나 신기하고 의문스럽다. 물론 이물감이야 실은 그 안의 인물들로부터 느끼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 때는 카메라의 엄밀함이 순수하게 경탄스러이 다가온다. 이를테면 풍경이나 정물을 비추는, 혹은 빈 공간을 바라보는, 인물이 없는 장면들. 엷은 뱃소리와 함께 아이들의 등교하는 뒷모습 정도만을 붙잡는 거리와 기찻길 등의 정경을 비추는 오프닝이나, 이따금 끼어드는 빨랫줄, 빈 방, 빈 복도 등의 더없는 평온함, 다시금 흘러가는 배를 바라보는 엔딩처럼 어째선지 그런 순간이 정서적으론 더 조밀한 울림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여하간 <동경 이야기>엔 자식 세대에게 전하는 제법 가부장적이기도 하고, 보수적인, 씁쓸한 시선이 있다. 오늘날 보기엔 어딘가 까끌할 법도 한 그 태도를 온건하고 여전히 거부감 없이, 효과적이고 또 얼마간 성찰마저 이끌어내는 정서는 어떻게 가능한 걸까. 단순히 정물적인 풍경 숏 덕택이라고 말하면 지나치게 순진한 감상일 텐데, 그런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뻣뻣한 숏은, 모르긴 몰라도, 나이가 들면 달리 보일 것이라는 평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초연하지만 체념적이고 따스하지만 쓸쓸한 공기로 가득하다. 그러고 보면, 유독 노부부에게서만 작위건 정서건 도드라졌다. 물론 영화가 노부부를 주인공으로, 또 당신들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탓이긴 해도, 친구들과 술을 진탕 먹고 밤늦게 찾아온 류 치슈를 향해 불평을 쏟아내는 딸처럼 아버지의 모자를 들었다 놨다 하는 유머스러운 짜증이나 화면을 수직과 수평으로 오가는 부단한 움직임은 이상하게 활력적이고 또 자연스럽다. 표면의 친절이나 웃음보다 불평과 짜증에서 오히려 자연스러운 활력이 느껴진다는 점이 <동경 이야기>의 정서와 맞물려 야릇하게 다가온다. 아타미에서도 비슷한 인상이다. 노부부가 잠자리에 들고, 방 밖에 놓인 두 사람의 슬리퍼만 비추는 정물의 숏에서도 화면 우측엔 유리에 반사된 분주한 움직임이 있다. 그 다음 순간도 마찬가지다. 나란히 누운 부부는 요란함에 쉬이 잠들지 못하는 반면, 이후 맞붙은 숏엔 좌측에는 담소를 나누는 남녀와 우측에는 밝은 인사와 함께 서로를 교차하는, 잠들지 못하는 밤의 그 요란함을 즐기는 분방한 동선들이 있다. 이런 대조. 허나 대조적인 상황의 정서를 고스란히 물려 받는 건 오직 노부부다. (물론 끝내 눈물을 터트리는 하라 세츠코도 노부부와 함께 그려질 수 있을 듯한데, 글 도입부에서 언급한 세 사람의 기이한 대화 편집처럼 생각해보면 하라 세츠코 역시 시종 고집하는 웃음마냥 표정과 행동의 경직이 느껴졌을 뿐더러, 무엇보다 심리적 경직이 문제되는 캐릭터다. 또 자식 세대보다 노부부와 궤적을 함께한다는 점에서 아무래도 노부부와 더불어 정서를 분유하는 것 같다.) 그럼 노부부가 드러내는 부자연스러움, 뻣뻣함이 되레 정서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일까. 그들이 보이는 어색하고 뻣뻣한, 느린 움직임은 자체로 지나간 시간의 흔적이자 자식 세대와는 구분되는 징후인 걸까. 시선과 행동의 등속도, 등방향성은 한 사람마냥 동체가 된 부부의 모습일까. 정면 클로즈업으로 교차되는 숏/리버스의 분리 내지 절연의 인상과 대화하는 두 사람의 시선의 묘한 불일치가 주는 불편함은 <동경 이야기>가 얼마간 지시하듯 균열하는 가족과 세대, 세상의 모습을 잠재적으로 감각케 하는 식의 관습적이고 순진한 감상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사실 180도 가상선과 같이 시선의 일치가 주는 편안함은 할리우드적인 편집, 즉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 걸 생각하면 오즈의 불일치는 그 눈속임을 폭로한다는 점에서 되레 역설적으로 자연스러운 시선으로 이해될 수도 있어 보인다. 그럼 이 '부자연스러운 자연스러움'은 천연한 삶의 흐름을 거스르는 게 아니라 꼭 그에 걸맞은 형식이 될 수 있는 걸까. 현재로선 어떤 감상에도 쉬이 답을 내리지 못하겠다. <동경 이야기>에만 해당될 감상은 아닌 것 같고 어느 정도는 오즈 전반에 대한 것이라 감히 짐작해보는데, 과연 의도된 경직과 부자연스러움이 내용과 조화를 이루는 것인지 반하는 것인지, 오즈의 '소우주'라고도 일컬어지는 그 스타일을 지나치게 강박적이고 예속된 세계로 보아야 하는지 자기완결적인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무래도 어렵다. 오즈의 영화에서 드러나는 어떤 부자연스러움 같은 것이 "이야기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화면 보기를 포기한 경우 산뜻하게 잊어버릴 수 있는"(하스미 시게히코) 것이라면, 나는 <만춘>에선 잊었고 <동경 이야기>에선 의식했다. 종국에 이르러 영화의 정서에 터무니없이 감화되는 건 매한가지긴 하나, 한 번 의식하면 불안하다거나 불편할 정도로 눈에 들어오는 느낌이라 그 차이는 커 보인다. 두 감상의 차이를 내심 짚어보려 하니, 극장 아닌 집에서 본 탓이라는 옹졸한 변명과 온전한 감상보다 분석적인 욕구가 앞섰다는 치기 어린 변명이 앞선다. 사실 그보다는 역대 최고 영화라 곧잘 칭해지는 <동경 이야기>라는 작품에 대한 (좋아하고 싶은) 부담 내지 설렘과, 동시에 모두가 좋다니 <동경 이야기> 같은 대표작보단 감독의 다른 작품을 괜시리 최고작으로 내세우고 싶은 거들먹거림 같은 두 종류의 확증 편향으로 솔직하지 못한 게 가장 큰 이유 같다 😓 물론 <동경 이야기>도 그렇고 오즈의 영화를 진정 위대하게 만드는 건 그 안에 담긴 태도와 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갈등이나 죽음을 다루는 무던함 속에 삶을 겸허하고도 지극하게 바라보는 태도는 과장되고 자극적으로 도취된 영화에선 찾기 어려운 아름다움일 것이다. 이에 그런 소중한 시선을 더 짚고 살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낯설고 이질적인 형식이 눈에 밟힌 터라 행여나 그 아름다움을 해할까 싶은 반항어린 의문에 개인적으론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튼 답을 여전히 얻지 못한 지금으로선 이런저런 변명 속에서 오즈의 '소우주'를 부러 의식하며 주춤거리게 되는데,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처음 보고, 혹은 단 한 편만 보고 그의 영화가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은 ... 착각하고 있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는 정성일 평론가의 말처럼, 이제 겨우 세 편의 오즈를 마주한 내가 그와 그의 영화의 위대함을 ㅡ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ㅡ 짐작하는 건 경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권혜정
3.5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위해 살아가지, 솔직한 담담함이 마음 아프면서도 깊이 있게 와닿는다. @2022 cgv 오즈 야스지로 특별전
신준섭
5.0
이 영화를 두 번 더 보고싶다. 내가 중년이 되었을 때, 내가 노년이 되었을 때.
STONE
4.0
필연적인 순환에 순응하는 캐릭터,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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