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기현5.0영화라는 매체는 기본적으로 죽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사를 찍고 스크린에 영사하는 매체임에도 피사체가 프레임에 담기는 순간 그 이미지는 어쩔 수 없이 과거의 것이 된다. 프레임 속에 시간이 갇히는 것이다. 그렇게 영화가 아무리 현실을 담았다고 할지언정 우리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을 수 밖에 없고 일방적인 방향의 전달을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이를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라는 매체의 속성일 뿐이다. 그러나 영화의 마법은 그 죽은 세계에서 살아있는 것을 발견할 때 시작된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클로즈업>의 경우 현실과 픽션을 교묘하게 섞어내며 카메라가 비추는 대상은 이미 지나버린 세상임에도 우리에게 넘어오는 지점들이 존재한다.(실제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도 그렇지만 오랫동안 카메라가 비추는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캔이나 저화질 카메라로 찍은 듯한 재판 과정이 그렇다.)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8과 1/2>는 영화의 현실 장면과 귀도가 만드려는 영화의 일치되는 부분을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통해 꿈과 현실을 뒤섞으며 나아가 관객과 영화의 경계를 해체하기도 한다. 요컨대, 아무리 영화의 세계는 이미 죽었을지언정 좋은 영화들의 세계는 관객들 안에서 다시 생명을 얻게 된다. 아마 이 마법 덕분에 관객들은 영화를 보고 울고 웃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1955년에 개봉한 "박남옥" 감독의 <미망인>은 결말이 유실된 작품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어떻게 결말이 나는지 이야기가 남아있긴 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든다. 원래의 결말의 이야기를 가져와서 스크린에 복원하면 이는 과연 해당 영화를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아니다. <미망인>의 결말의 이야기가 남아있을지언정 이를 복원하는 감독마다 연출 방향성이 다를 것이며 이야기의 해석 또한 다를 것이다. 마치 부품을 갈아 끼운 테세우스의 배처럼 결말이 유실된 <미망인>에 결말을 복원해 붙여도 완전한 복원이 될 수 없으며 그 순간 이미 "박남옥" 감독의 <미망인>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말 없는 영화를 보는 것도 진정한 의미의 <미망인>을 관람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감독은 분명 결말까지 감상하는 것을 상정하고 만든 영화일테니까 말이다. 뭐가 됐든 어떤 방식으로도 결국 현대 관객들은 박남옥 감독의 진정한 <미망인>은 볼 수 없을 것이다.(물론 유실된 결말이 찾아진다면 그렇진 않을 수도 있긴 하다만...) 그럼에도 <무관한 당신들에게>는 유실된 <미망인>의 결말을 복원한다. 4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는 소개와 같은 김태양 감독의 <무관한 당신들에게>로 시작하여 결말을 두 개의 관점으로 재해석한 이종수 감독의 <이신자>와 이미랑 감독의 <미망인: 다시 맺음>, 그리고 박남옥 감독이 연모했던 김신재 배우와의 관계를 탐색하는 <보이지 않는 얼굴(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 영화들은 <미망인>의 결말을 "그대로" 복원하려 하지는 않는다고 느꼈다. 어쩌면 "복원"이라는 관점에서는 무용해보이는 이 시도를 통해 오히려 다각도로 <미망인>을 탐색하고 해체해서 재조합하는데 성공한다. 오히려 과거의 대한민국이 아닌 당당히 현재의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보여주며 시간을 분해하기도 하고,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닿을 수 없는 두 남녀의 이야기를 통해 공간을 나누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결국 <미망인>의 세계가 복원이 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 의해 "죽어버린" 세계임을 역설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무관한 당신들에게>는 <미망인>에게 그렇게 새로운 생명을 주게 된다. 죽어버린 세계의 시간과 공간의 해체는 어쩌면 영화만이 해낼 수 있는, 죽어버린 세계이기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무관한 당신들에게는>은 말한다. 복원할 수 없기 때문에, 이미 죽어버린 세계이기에, 영화를 보는 순간만큼은 영화가 살아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죽음이란 사는 것들만 가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객은 이 경험으로 70년의 시간의 흐름을 경험할 수 있고, 다른 공간을 가보며, 영화는 관객들의 안에서 다시 한번 새로운 가치로써 살아나게 된다. p.s. 개인적으로 제일 좋았던 단편은 손구용 감독님의 <보이지 않는 얼굴(들)>이었다. 같은 공간에 있는 두 남녀는 20평 남짓하는 놀이터에서 돌아다니지만 그들은 만나지 못한다. 그들의 만남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일까? 시간일까? 애초에 그 둘이 만날 필요가 있는 걸까? 그 일상적인 몸짓과 배우들과 공간의 상호작용은 관객들로 하여금 일상을 오히려 낯설게 만들고 그리고 그 사이에서 관객들은 영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된다. 일방적으로 전달할 뿐인 영화가 체험의 영역으로 관객들을 이끌어 주는 것이다. 그런 작품을 관객들이 꽉 찬 극장에서 영화의 세계로 들어가는 경험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원래는 전시로 기획된 작품이라고 하는데 전시로도 보면 정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いいね3コメント0
동구리2.5문주화 영화평론가의 기획을 통해 진행된,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의 유일한 작품 <미망인>(1955)의 유실된 결말을 상상한 네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옴니버스 영화. 처음에는 극장이 아닌 전시를 통해 공개되었다. 김태양의 <무관한 당신들에게>는 <미망인> 후반부의 장면과 <미망인>을 언급하는 감독의 작품(장편 <미망> 속 두 번째 에피소드로, <서울극장>이라는 단편으로 사전에 공개됐었음)을 교차편집한다. 이종수의 <이신자(異晨者)>는 바뀐 한자 이름(본래 <미망인>의 주인공 이신자의 한자 이름은 李信子다)처럼 이신자가 칼을 고르는 장면을 통해 극의 분위기를 변화시킨다. 본래 서로 마주 본 스크린을 통한 2채널 작업으로 구성된 손구용의 <보이지 않는 얼굴(들)>은 마주하지만 마주하지 못하는 두 인물의 동선을 뒤쫓는다. 이미랑의 <미망인: 다시 맺음>은 '아프레걸' 이신자에게 합당한 결말을 부여하길 시도한다. 한국영화사의 기념비적인, 하지만 필름의 마지막 릴이 유실되어 결말을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영화의 끝을 상상하고 재구성한다는 기획은 분명 흥미롭다. 누군가는 그것을 지금의 조건(자신의 전작이나 2채널 영상)을 통해 에세이나 구조영화 속에 위치시키고자 하고, 누군가는 문자 그대로 유실된 장면 속에 담겼기를 소망하는 이미지를 재현한다. 사실 그 정도의 차이, 네 감독이 얼마나 다르게 영화를 만들고 있으며 그것이 러닝타임 50분의 '극장용' 옴니버스로 묶였을 때 서로 강하게 불화한다는 지점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いいね2コメント0
박상민2.5<무관한 당신들에게>는 12월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상영되기 전, 11월에 동명의 전시로 먼저 공개되었다. 아무래도 전시와 영화를 비교하게 되는데, <미망인>에서 이종수 감독이 연출한 <이신자>로 넘어가는 편집을 제외하면 전시 형식이 더 적합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전시 때는 입구 바로 앞에 김태양 감독의 <무관한 당신들에게>가 재생 중인 모니터가 놓여있었다. 그 모니터 오른쪽 벽에는 박남옥 감독과 전시 내용에 관한 설명이 적혀있었다. 모니터를 지나 공간 안쪽으로 들어가면 오른쪽 벽에 박남옥 감독의 <미망인>이 상영되고 있다. 다른 작품들의 사운드가 개별 헤드폰을 통해 출력되는 것과 달리 <미망인>의 사운드는 스피커를 통해 전시장 전체에 울려퍼진다. <미망인>을 뒤로 하고 맞은 편 벽으로 가면 귀퉁이에 걸린 양면 스크린에 손구용 감독의 <보이지 않는 얼굴(들)>이 상영되고 있다. 무성영화고, 각 면의 스크린에 서로 다른 영상이 영사된다. 관객은 어느 화면을 볼지 선택해야만 한다. 여자가 나오는 화면을 볼 때는 전시장을 등지고 구석을 바라보며 앉아야 하고, 반대로 남자가 나오는 화면을 보려면 구석에 앉아서 전시장(특히 <미망인>이 영사되는 벽면)을 함께 볼 수밖에 없다. 그 바로 옆에는 이미랑 감독의 <미망인: 다시 맺음>이 상영되고, 그 옆에는 이종수 감독의 <이신자>가 상영된다. 이 두 편은 <미망인>의 유실된 결말을 다시 상상한 영화들이다. 한편 극장 상영 버전에서는 김태양 감독의 영화가 먼저 나오고, 뒤를 이어 <미망인> 본편, 이종수 감독의 <이신자>, 손구용 감독의 <보이지 않는 얼굴(들)>, 이미랑 감독의 <미망인: 다시 맺음>이 상영된다. 전시의 경우 따로 동선이나 작품의 상영시간표가 정해져있지 않다. 각 작품이 루프 형태로 반복 재생되며, 관객은 각 작품 사이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작품을 중간부터 볼 수도 있고, 보던 중에 다른 작품을 보러갈 수도 있고, 위치에 따라서는 두 작품을 동시에 볼 수도 있다. 그리고 각 작품의 소리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한다. 무성 영화인 손구용 감독의 영화를 보는 중에 <미망인>의 소리가 들려오고, 이종수 감독의 영화를 보는 중에 헤드폰을 뚫고 이미랑 감독의 영화 속 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미망인>의 유실된 결말을 상상하고, 이를 통해 픽션의 역량을 실험하는 것이 전시의 목적이라면 관객은 수동적인 관람자가 아니라 픽션을 재조합하는 또하나의 창작자가 될 기회를 부여받는다. 픽션의 가능성은 이곳에 있다. 하지만 극장 상영본은? 철저하게 구분된 순서에 따라 상영되며 각 작품의 이미지와 사운드가 다른 작품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관객도 주어진 순서의 관람을 강요받는다. 특히나 손구용 감독의 영화는 양면 상영이 듀얼 스크린 상영으로 바뀐다. 한 스크린에 두 화면이 동시에 상영된다. 관객은 더이상 선택의 문제를 겪지 않는다. 상영 순서도 정해졌고, 모든 선택지는 한 화면에 전부 들어갔다. 수동적인 관객만 남은 자리에 창조적 픽션은 더이상 있을 수 없다. 유실된 결말을 상상하는 '픽션'의 역량에만 초점을 맞췄기에 서울독립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되었을 테다. 그러나 오히려 극장과 영화의 한계만 여실히 드러내고 만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극장은, 적어도 동시대 영화에게는, 최적의 장소가 아닐지도 모른다.一番最初に「いいね」してみましょう。コメント0
구기현
5.0
영화라는 매체는 기본적으로 죽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사를 찍고 스크린에 영사하는 매체임에도 피사체가 프레임에 담기는 순간 그 이미지는 어쩔 수 없이 과거의 것이 된다. 프레임 속에 시간이 갇히는 것이다. 그렇게 영화가 아무리 현실을 담았다고 할지언정 우리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을 수 밖에 없고 일방적인 방향의 전달을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이를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라는 매체의 속성일 뿐이다. 그러나 영화의 마법은 그 죽은 세계에서 살아있는 것을 발견할 때 시작된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클로즈업>의 경우 현실과 픽션을 교묘하게 섞어내며 카메라가 비추는 대상은 이미 지나버린 세상임에도 우리에게 넘어오는 지점들이 존재한다.(실제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도 그렇지만 오랫동안 카메라가 비추는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캔이나 저화질 카메라로 찍은 듯한 재판 과정이 그렇다.)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8과 1/2>는 영화의 현실 장면과 귀도가 만드려는 영화의 일치되는 부분을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통해 꿈과 현실을 뒤섞으며 나아가 관객과 영화의 경계를 해체하기도 한다. 요컨대, 아무리 영화의 세계는 이미 죽었을지언정 좋은 영화들의 세계는 관객들 안에서 다시 생명을 얻게 된다. 아마 이 마법 덕분에 관객들은 영화를 보고 울고 웃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1955년에 개봉한 "박남옥" 감독의 <미망인>은 결말이 유실된 작품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어떻게 결말이 나는지 이야기가 남아있긴 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든다. 원래의 결말의 이야기를 가져와서 스크린에 복원하면 이는 과연 해당 영화를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아니다. <미망인>의 결말의 이야기가 남아있을지언정 이를 복원하는 감독마다 연출 방향성이 다를 것이며 이야기의 해석 또한 다를 것이다. 마치 부품을 갈아 끼운 테세우스의 배처럼 결말이 유실된 <미망인>에 결말을 복원해 붙여도 완전한 복원이 될 수 없으며 그 순간 이미 "박남옥" 감독의 <미망인>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말 없는 영화를 보는 것도 진정한 의미의 <미망인>을 관람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감독은 분명 결말까지 감상하는 것을 상정하고 만든 영화일테니까 말이다. 뭐가 됐든 어떤 방식으로도 결국 현대 관객들은 박남옥 감독의 진정한 <미망인>은 볼 수 없을 것이다.(물론 유실된 결말이 찾아진다면 그렇진 않을 수도 있긴 하다만...) 그럼에도 <무관한 당신들에게>는 유실된 <미망인>의 결말을 복원한다. 4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는 소개와 같은 김태양 감독의 <무관한 당신들에게>로 시작하여 결말을 두 개의 관점으로 재해석한 이종수 감독의 <이신자>와 이미랑 감독의 <미망인: 다시 맺음>, 그리고 박남옥 감독이 연모했던 김신재 배우와의 관계를 탐색하는 <보이지 않는 얼굴(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 영화들은 <미망인>의 결말을 "그대로" 복원하려 하지는 않는다고 느꼈다. 어쩌면 "복원"이라는 관점에서는 무용해보이는 이 시도를 통해 오히려 다각도로 <미망인>을 탐색하고 해체해서 재조합하는데 성공한다. 오히려 과거의 대한민국이 아닌 당당히 현재의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보여주며 시간을 분해하기도 하고,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닿을 수 없는 두 남녀의 이야기를 통해 공간을 나누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결국 <미망인>의 세계가 복원이 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 의해 "죽어버린" 세계임을 역설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무관한 당신들에게>는 <미망인>에게 그렇게 새로운 생명을 주게 된다. 죽어버린 세계의 시간과 공간의 해체는 어쩌면 영화만이 해낼 수 있는, 죽어버린 세계이기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무관한 당신들에게는>은 말한다. 복원할 수 없기 때문에, 이미 죽어버린 세계이기에, 영화를 보는 순간만큼은 영화가 살아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죽음이란 사는 것들만 가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객은 이 경험으로 70년의 시간의 흐름을 경험할 수 있고, 다른 공간을 가보며, 영화는 관객들의 안에서 다시 한번 새로운 가치로써 살아나게 된다. p.s. 개인적으로 제일 좋았던 단편은 손구용 감독님의 <보이지 않는 얼굴(들)>이었다. 같은 공간에 있는 두 남녀는 20평 남짓하는 놀이터에서 돌아다니지만 그들은 만나지 못한다. 그들의 만남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일까? 시간일까? 애초에 그 둘이 만날 필요가 있는 걸까? 그 일상적인 몸짓과 배우들과 공간의 상호작용은 관객들로 하여금 일상을 오히려 낯설게 만들고 그리고 그 사이에서 관객들은 영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된다. 일방적으로 전달할 뿐인 영화가 체험의 영역으로 관객들을 이끌어 주는 것이다. 그런 작품을 관객들이 꽉 찬 극장에서 영화의 세계로 들어가는 경험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원래는 전시로 기획된 작품이라고 하는데 전시로도 보면 정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동구리
2.5
문주화 영화평론가의 기획을 통해 진행된,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의 유일한 작품 <미망인>(1955)의 유실된 결말을 상상한 네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옴니버스 영화. 처음에는 극장이 아닌 전시를 통해 공개되었다. 김태양의 <무관한 당신들에게>는 <미망인> 후반부의 장면과 <미망인>을 언급하는 감독의 작품(장편 <미망> 속 두 번째 에피소드로, <서울극장>이라는 단편으로 사전에 공개됐었음)을 교차편집한다. 이종수의 <이신자(異晨者)>는 바뀐 한자 이름(본래 <미망인>의 주인공 이신자의 한자 이름은 李信子다)처럼 이신자가 칼을 고르는 장면을 통해 극의 분위기를 변화시킨다. 본래 서로 마주 본 스크린을 통한 2채널 작업으로 구성된 손구용의 <보이지 않는 얼굴(들)>은 마주하지만 마주하지 못하는 두 인물의 동선을 뒤쫓는다. 이미랑의 <미망인: 다시 맺음>은 '아프레걸' 이신자에게 합당한 결말을 부여하길 시도한다. 한국영화사의 기념비적인, 하지만 필름의 마지막 릴이 유실되어 결말을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영화의 끝을 상상하고 재구성한다는 기획은 분명 흥미롭다. 누군가는 그것을 지금의 조건(자신의 전작이나 2채널 영상)을 통해 에세이나 구조영화 속에 위치시키고자 하고, 누군가는 문자 그대로 유실된 장면 속에 담겼기를 소망하는 이미지를 재현한다. 사실 그 정도의 차이, 네 감독이 얼마나 다르게 영화를 만들고 있으며 그것이 러닝타임 50분의 '극장용' 옴니버스로 묶였을 때 서로 강하게 불화한다는 지점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유진초이
3.5
유실된 영화의 앞 뒤 옆을 확장하는 픽션의 힘
이춘희
4.5
과거와 현재를 현명하게 잇는 영화-fiction의 힘
토토로
3.5
영화의 유실된 부분을 지금의 상상력으로 이어보여줘서 좋았으며 미망인 원작 부분도 재밌었다
박상민
2.5
<무관한 당신들에게>는 12월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상영되기 전, 11월에 동명의 전시로 먼저 공개되었다. 아무래도 전시와 영화를 비교하게 되는데, <미망인>에서 이종수 감독이 연출한 <이신자>로 넘어가는 편집을 제외하면 전시 형식이 더 적합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전시 때는 입구 바로 앞에 김태양 감독의 <무관한 당신들에게>가 재생 중인 모니터가 놓여있었다. 그 모니터 오른쪽 벽에는 박남옥 감독과 전시 내용에 관한 설명이 적혀있었다. 모니터를 지나 공간 안쪽으로 들어가면 오른쪽 벽에 박남옥 감독의 <미망인>이 상영되고 있다. 다른 작품들의 사운드가 개별 헤드폰을 통해 출력되는 것과 달리 <미망인>의 사운드는 스피커를 통해 전시장 전체에 울려퍼진다. <미망인>을 뒤로 하고 맞은 편 벽으로 가면 귀퉁이에 걸린 양면 스크린에 손구용 감독의 <보이지 않는 얼굴(들)>이 상영되고 있다. 무성영화고, 각 면의 스크린에 서로 다른 영상이 영사된다. 관객은 어느 화면을 볼지 선택해야만 한다. 여자가 나오는 화면을 볼 때는 전시장을 등지고 구석을 바라보며 앉아야 하고, 반대로 남자가 나오는 화면을 보려면 구석에 앉아서 전시장(특히 <미망인>이 영사되는 벽면)을 함께 볼 수밖에 없다. 그 바로 옆에는 이미랑 감독의 <미망인: 다시 맺음>이 상영되고, 그 옆에는 이종수 감독의 <이신자>가 상영된다. 이 두 편은 <미망인>의 유실된 결말을 다시 상상한 영화들이다. 한편 극장 상영 버전에서는 김태양 감독의 영화가 먼저 나오고, 뒤를 이어 <미망인> 본편, 이종수 감독의 <이신자>, 손구용 감독의 <보이지 않는 얼굴(들)>, 이미랑 감독의 <미망인: 다시 맺음>이 상영된다. 전시의 경우 따로 동선이나 작품의 상영시간표가 정해져있지 않다. 각 작품이 루프 형태로 반복 재생되며, 관객은 각 작품 사이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작품을 중간부터 볼 수도 있고, 보던 중에 다른 작품을 보러갈 수도 있고, 위치에 따라서는 두 작품을 동시에 볼 수도 있다. 그리고 각 작품의 소리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한다. 무성 영화인 손구용 감독의 영화를 보는 중에 <미망인>의 소리가 들려오고, 이종수 감독의 영화를 보는 중에 헤드폰을 뚫고 이미랑 감독의 영화 속 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미망인>의 유실된 결말을 상상하고, 이를 통해 픽션의 역량을 실험하는 것이 전시의 목적이라면 관객은 수동적인 관람자가 아니라 픽션을 재조합하는 또하나의 창작자가 될 기회를 부여받는다. 픽션의 가능성은 이곳에 있다. 하지만 극장 상영본은? 철저하게 구분된 순서에 따라 상영되며 각 작품의 이미지와 사운드가 다른 작품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관객도 주어진 순서의 관람을 강요받는다. 특히나 손구용 감독의 영화는 양면 상영이 듀얼 스크린 상영으로 바뀐다. 한 스크린에 두 화면이 동시에 상영된다. 관객은 더이상 선택의 문제를 겪지 않는다. 상영 순서도 정해졌고, 모든 선택지는 한 화면에 전부 들어갔다. 수동적인 관객만 남은 자리에 창조적 픽션은 더이상 있을 수 없다. 유실된 결말을 상상하는 '픽션'의 역량에만 초점을 맞췄기에 서울독립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되었을 테다. 그러나 오히려 극장과 영화의 한계만 여실히 드러내고 만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극장은, 적어도 동시대 영화에게는, 최적의 장소가 아닐지도 모른다.
코스믹아울
3.5
제51회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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