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y Oh3.0원작자, 감독, 배우, 캐릭터, 관객을 한 곳에 모아 경계 를 희미하게 하니 꿈이자 정령이 되었다. 메타 + 셰익스피어라 흥미롭긴 하지만, 그만큼 자폐적이기도 한 느낌이었다. Prospero: But what if it could get darker than dark?いいね26コメント1
샌드4.0셰익스피어의 문학을 연극으로 연기하는 배우를 영화라는 매체 속에 불러와 문학 속 등장인물, 연극 배우, 영화 배우의 공통적인 성질을 들여다 보면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발칙한 상상으로 뒤집어 엎기도 하며, 영화 바깥의 실제 배우와 감독의 이야기까지 끌고와 다층 구조를 깨기도 하는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유명 문학 작품 속 등장인물이 자아를 가지고 행동한다는 게 어쩌면 이미 많이 했던 거라 고루해 보이기도 하는 점이 있지만 압도적인 촬영과 색감, 톤과 분위기, 그리고 다양하게 재구성해 하고자 하는 말을 직접 전달한다는 점에 신선하고 흥미롭습니다. <템페스트>를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전부 다 읽으면 물론 제일 좋겠습니다만, 그러지 않는다면 최소한 시코락스, 아리엘, 프로스페로 등 영화에 등장하는 <템페스트>의 주요 캐릭터 관계와 이야기 정도만 훑고 보시면 영화에 놓치는 것 없이 깊게 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도 다양하게 나오지만 대부분 상식선에서 알고 있는 걸 하는지라 꼭 알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적습니다. 대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연속해서 적극적으로 영화로 끌고 들어온 피녜이로의 영화, 특히 그중 파티뇨와 함께 한 <시코락스> 만큼은 꼭 보시는 걸 권해드립니다. - 왜냐면 이 작품은 제가 처음 봤을 땐 고전 작품의 연극을 영화로 끌어온 스트로브/위예의 뿌리에서 이어져 확장한 작품이겠구나 싶었는데 뒤로 갈수록 에 작품은 뭔가 <시코락스>를 본 관객이 어려울 만한 지점을 하나하나 친절히 짚으며 해설하는 영화에 더 가까웠습니다. 왜 하필 시코락스와 아리엘인지, 왜 배우가 계속 돌아가며 같은 말을 반복하는지, 자연과 인물을 겹치는 연출은 왜 쓰는지 등 뭔가 알듯 말듯 애매모호한 지점을 이 작품에서 직접 캐릭터의 입을 통해 전합니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대체적으론 <시코락스>의 아이디어를 이어 확장한 것도 맞지만 파티뇨가 직접 쓴 <시코락스>의 영상 평론같은 느낌이 들기까지고 합니다. 결국 왜 그 수많은 셰익스피어 작품 중에서 하필 <시코락스>와 <아리엘>인가에 대해선, 섬이라는 작품 속에서 작가의 성질과 같은 시코락스와 자유를 갈망하는 등장인물의 성질과 같은 정령인 아리엘이 이 커다란 영화 속에서 가장 그에 부합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물과 바람, 안개와 불 등 자연물을 통해서 우령의 곁을 떠도는 정령의 소리를 시청각으로 압도하는 촬영에 담아낼 수 있다는 점 역시도 왜 하필 아리엘인가에 대해 좋은 설득이 됩니다. 피녜이로, 트루에바, 심지어 본인까지 제4의 벽을 깨가면서 재치있게 판을 키우는 것도 아리엘의 자유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니였을까 싶기도 합니다. 내내 아리엘과 겹치는 자연의 풍광과 색감에 눈이 호강하면서 어렵지만 너무 어렵지 않고 유쾌한 장난기도 많이 엿보여 지루함 없이 재밌게 본 작품이였습니다.いいね8コメント0
김도현3.0단평 | 가장 게으른 창작 방식이란 바로 그 창작 과정 자체를 극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인데, 이야기를 자력으로 지탱시킬 만한 힘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방법론의 거의 모든 레시피가 공개된 시점에서 이를 답습할 뿐인 영화는 스스로의 자폐적 한계만 드러낸다. 그걸 코멘터리로 받아들이자니 새로운 통찰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렵고, 유희로 받아들이자니 관객으로서 하나도 즐겁지가 않다. | 지하실 로그 | 198 | 전주국제영화제 | 5/1いいね4コメント0
사랑은 비를 타고4.0“사느냐, 죽느냐(To be or not to be) 그것이 문제로다.“ 셰익스피어의 문학을 통해 메타적으로 풀어낸 존재론적 고민. 발상이 되게 기발하고 재미있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 묘하게 하마구치 류스케의 작품이 떠오르는데, 하마구치 류스케의 작품이 산문을 읽는 듯한 느낌이라면, <아리엘>은 그걸 운문 버전으로 변주를 준 느낌이랄까... 하여튼 굉장히 흥미로운 작품.いいね3コメント0
박상민3.51. 로이스 파티뇨와 마티아스 피녜이로의 협업, 셰익스피어 인용 등을 이유로 많은 이들이 <시코락스>와 <아리엘>을 연결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시간이 더이상 흐르지 않는 듯한 외딴 해안 마을/섬마을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면에서 <붉은 달의 조류>와 더 가깝게 느껴진다. 2. (영화 보고 2주 만에 메모하려니까 약간 헷갈리는데) <아리엘>에는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인물이 두 명 뿐이다. 하나는 아구스티나가 섬에 들어오면서 다른 지인들에게 연락할 때이고, 다른 하나는(내 기억이 맞다면) 항구 매표소 직원들이 한 번 사용한다. 섬 전체가 하나의 연극 무대이고, 매표소는 외부와 연결되는 유일한 창구라고 한다면, 아구스티나가 스마트폰을 더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는 시점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그녀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연극의 세계에 빠져드는가? 3. <아리엘>의 결말에서 아구스티나는 이렌느에게 이 영화를 끝내지 말자고 한다. 몇 년 전에 봤다면 그저 감동을 받았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감흥이 조금 다르다. 영화는 매체 특성 상(미술관에서 루프 형식으로 상영하지 않는 한) 끝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영화를 끝내지 않기로 인물들이 다짐해봐야 영화는 끝날 것이다. 그러니 오히려 끝을 인정했더라면, 오히려 연극과는 다른 영화만의 끝을 만들었더라면 그 편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4. <아리엘>은 파티뇨와 피녜이로의 협업으로 시작되었으나 피녜이로가 중도에 빠지며 파티뇨의 단독 연출작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영화에 대사로도 삽입되어있다. 이 영화는 파티뇨의 영화인가, 피녜이로의 영화인가 자문하는 대사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아리엘>에서 이와 같이 노골적으로 언급되는 텍스트들 중에 내게 가장 흥미로운 이름은 사실 파티뇨와 피녜이로가 아닌, 트루에바였다. 아구스티나가 이렌느와 첫 인사를 나누면서 나누는 대화에서 이렌느가 트루에바의 영화에 출연했다는 것이 대사로 언급된다.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쓰는 80년대생 40대 감독 트루에바, 피녜이로, 파티뇨. 이들의 이름이 교차하는 <아리엘>. 어쩐지 셰익스피어를 인용하거나 각색하기보다 지금의 스페인 혹은 남미(그중에서도 아르헨티나) 영화계와 감독들의 지형도를 그리는 작업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いいね3コメント0
Lancelot3.5영화, 소설 같은 창작물 속 존재들에 대한 메타적 고찰이 새로울 것은 없었지만 노골적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흥미로웠다. 다만 노골적이기만 한 그 고찰이 피녜이로가 여태 이룬 셰익스피어 세계관 앞에서 불쾌하기까지 했다. 애매하게 남아있는 피녜이로의 터치가 역효과를 남긴 것이 아닐까. 파티뇨 스스로 하는 이야기가 더 좋았었는데 말이지. 그래도 장점도 많은 작품이고 전주영화제 첫날을 시작하기에 손색이 없었다.いいね3コメント0
Jay Oh
3.0
원작자, 감독, 배우, 캐릭터, 관객을 한 곳에 모아 경계 를 희미하게 하니 꿈이자 정령이 되었다. 메타 + 셰익스피어라 흥미롭긴 하지만, 그만큼 자폐적이기도 한 느낌이었다. Prospero: But what if it could get darker than dark?
Sz
3.5
해가 뜨면 다시 시작되는 연극 덮이면 다시 펼쳐지는 책
샌드
4.0
셰익스피어의 문학을 연극으로 연기하는 배우를 영화라는 매체 속에 불러와 문학 속 등장인물, 연극 배우, 영화 배우의 공통적인 성질을 들여다 보면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발칙한 상상으로 뒤집어 엎기도 하며, 영화 바깥의 실제 배우와 감독의 이야기까지 끌고와 다층 구조를 깨기도 하는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유명 문학 작품 속 등장인물이 자아를 가지고 행동한다는 게 어쩌면 이미 많이 했던 거라 고루해 보이기도 하는 점이 있지만 압도적인 촬영과 색감, 톤과 분위기, 그리고 다양하게 재구성해 하고자 하는 말을 직접 전달한다는 점에 신선하고 흥미롭습니다. <템페스트>를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전부 다 읽으면 물론 제일 좋겠습니다만, 그러지 않는다면 최소한 시코락스, 아리엘, 프로스페로 등 영화에 등장하는 <템페스트>의 주요 캐릭터 관계와 이야기 정도만 훑고 보시면 영화에 놓치는 것 없이 깊게 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도 다양하게 나오지만 대부분 상식선에서 알고 있는 걸 하는지라 꼭 알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적습니다. 대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연속해서 적극적으로 영화로 끌고 들어온 피녜이로의 영화, 특히 그중 파티뇨와 함께 한 <시코락스> 만큼은 꼭 보시는 걸 권해드립니다. - 왜냐면 이 작품은 제가 처음 봤을 땐 고전 작품의 연극을 영화로 끌어온 스트로브/위예의 뿌리에서 이어져 확장한 작품이겠구나 싶었는데 뒤로 갈수록 에 작품은 뭔가 <시코락스>를 본 관객이 어려울 만한 지점을 하나하나 친절히 짚으며 해설하는 영화에 더 가까웠습니다. 왜 하필 시코락스와 아리엘인지, 왜 배우가 계속 돌아가며 같은 말을 반복하는지, 자연과 인물을 겹치는 연출은 왜 쓰는지 등 뭔가 알듯 말듯 애매모호한 지점을 이 작품에서 직접 캐릭터의 입을 통해 전합니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대체적으론 <시코락스>의 아이디어를 이어 확장한 것도 맞지만 파티뇨가 직접 쓴 <시코락스>의 영상 평론같은 느낌이 들기까지고 합니다. 결국 왜 그 수많은 셰익스피어 작품 중에서 하필 <시코락스>와 <아리엘>인가에 대해선, 섬이라는 작품 속에서 작가의 성질과 같은 시코락스와 자유를 갈망하는 등장인물의 성질과 같은 정령인 아리엘이 이 커다란 영화 속에서 가장 그에 부합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물과 바람, 안개와 불 등 자연물을 통해서 우령의 곁을 떠도는 정령의 소리를 시청각으로 압도하는 촬영에 담아낼 수 있다는 점 역시도 왜 하필 아리엘인가에 대해 좋은 설득이 됩니다. 피녜이로, 트루에바, 심지어 본인까지 제4의 벽을 깨가면서 재치있게 판을 키우는 것도 아리엘의 자유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니였을까 싶기도 합니다. 내내 아리엘과 겹치는 자연의 풍광과 색감에 눈이 호강하면서 어렵지만 너무 어렵지 않고 유쾌한 장난기도 많이 엿보여 지루함 없이 재밌게 본 작품이였습니다.
김도현
3.0
단평 | 가장 게으른 창작 방식이란 바로 그 창작 과정 자체를 극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인데, 이야기를 자력으로 지탱시킬 만한 힘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방법론의 거의 모든 레시피가 공개된 시점에서 이를 답습할 뿐인 영화는 스스로의 자폐적 한계만 드러낸다. 그걸 코멘터리로 받아들이자니 새로운 통찰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렵고, 유희로 받아들이자니 관객으로서 하나도 즐겁지가 않다. | 지하실 로그 | 198 | 전주국제영화제 | 5/1
민드레
3.5
영원히 남아있을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살아 숨쉬는 이들은 망령일까?
사랑은 비를 타고
4.0
“사느냐, 죽느냐(To be or not to be) 그것이 문제로다.“ 셰익스피어의 문학을 통해 메타적으로 풀어낸 존재론적 고민. 발상이 되게 기발하고 재미있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 묘하게 하마구치 류스케의 작품이 떠오르는데, 하마구치 류스케의 작품이 산문을 읽는 듯한 느낌이라면, <아리엘>은 그걸 운문 버전으로 변주를 준 느낌이랄까... 하여튼 굉장히 흥미로운 작품.
박상민
3.5
1. 로이스 파티뇨와 마티아스 피녜이로의 협업, 셰익스피어 인용 등을 이유로 많은 이들이 <시코락스>와 <아리엘>을 연결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시간이 더이상 흐르지 않는 듯한 외딴 해안 마을/섬마을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면에서 <붉은 달의 조류>와 더 가깝게 느껴진다. 2. (영화 보고 2주 만에 메모하려니까 약간 헷갈리는데) <아리엘>에는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인물이 두 명 뿐이다. 하나는 아구스티나가 섬에 들어오면서 다른 지인들에게 연락할 때이고, 다른 하나는(내 기억이 맞다면) 항구 매표소 직원들이 한 번 사용한다. 섬 전체가 하나의 연극 무대이고, 매표소는 외부와 연결되는 유일한 창구라고 한다면, 아구스티나가 스마트폰을 더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는 시점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그녀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연극의 세계에 빠져드는가? 3. <아리엘>의 결말에서 아구스티나는 이렌느에게 이 영화를 끝내지 말자고 한다. 몇 년 전에 봤다면 그저 감동을 받았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감흥이 조금 다르다. 영화는 매체 특성 상(미술관에서 루프 형식으로 상영하지 않는 한) 끝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영화를 끝내지 않기로 인물들이 다짐해봐야 영화는 끝날 것이다. 그러니 오히려 끝을 인정했더라면, 오히려 연극과는 다른 영화만의 끝을 만들었더라면 그 편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4. <아리엘>은 파티뇨와 피녜이로의 협업으로 시작되었으나 피녜이로가 중도에 빠지며 파티뇨의 단독 연출작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영화에 대사로도 삽입되어있다. 이 영화는 파티뇨의 영화인가, 피녜이로의 영화인가 자문하는 대사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아리엘>에서 이와 같이 노골적으로 언급되는 텍스트들 중에 내게 가장 흥미로운 이름은 사실 파티뇨와 피녜이로가 아닌, 트루에바였다. 아구스티나가 이렌느와 첫 인사를 나누면서 나누는 대화에서 이렌느가 트루에바의 영화에 출연했다는 것이 대사로 언급된다.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쓰는 80년대생 40대 감독 트루에바, 피녜이로, 파티뇨. 이들의 이름이 교차하는 <아리엘>. 어쩐지 셰익스피어를 인용하거나 각색하기보다 지금의 스페인 혹은 남미(그중에서도 아르헨티나) 영화계와 감독들의 지형도를 그리는 작업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Lancelot
3.5
영화, 소설 같은 창작물 속 존재들에 대한 메타적 고찰이 새로울 것은 없었지만 노골적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흥미로웠다. 다만 노골적이기만 한 그 고찰이 피녜이로가 여태 이룬 셰익스피어 세계관 앞에서 불쾌하기까지 했다. 애매하게 남아있는 피녜이로의 터치가 역효과를 남긴 것이 아닐까. 파티뇨 스스로 하는 이야기가 더 좋았었는데 말이지. 그래도 장점도 많은 작품이고 전주영화제 첫날을 시작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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