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det5.0(이 글은 아무나 읽어도 상관없지만 특히 영화에 관심이 있는 기독교인이 더 읽어주기를 바란다.) 3월 26일 수요일 저녁 7시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마지막으로 상영되는 마이클 파웰, 에머릭 프레스버거의 걸작 <캔터베리 이야기>(1944)를 강력하게 추천한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늘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상영되는 트레일러에서 등장하는 한 여성의 얼굴 클로즈업 쇼트를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 얼굴 클로즈업 쇼트가 나오는 영화가 바로 <캔터베리 이야기>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시퀀스에서 그 얼굴 클로즈업 쇼트가 등장하기 때문에 그 쇼트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그 쇼트가 눈 앞에 나타났을 때 감흥이 더 클 것이다. <캔터베리 이야기>는 영국의 유명한 문학 작품인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의 현대판이라고 할 만하다. 보다 정확하게는 2차 대전 시기에 캔터베리 대성당 부근의 한 시골 마을에 머물게 된 세 명의 순례자에 관한 이야기다. 세 명의 순례자는 각각 미국 군인 밥, 영국 군인 피터, 영국인 여성 앨리슨이다. 이 세 명은 마을에서 계속 벌어지는 한 사건의 범인을 추적하면서 각자의 순례의 여정을 밟게 된다. 개인적으로 <캔터베리 이야기>는 지금까지 본 가장 훌륭한 기독교(적) 영화 중의 한 편이다. 내가 신학도는 아니지만 내 신앙 안에서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는 바람직한 영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노골적으로 기독교의 교리를 주입하는 식의 프로파간다적인 기독교 영화가 아니라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삶 가운데 하나님의 존재를 긍정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으므로 대안적인 기독교 영화의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나는 기독교적 영상 컨텐츠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영화를 보고 많은 영감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당장 내 스스로도 이런 류의 기독교 영화에 도전해보고 싶다. 물론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기독교를 의식하면서 이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중세 시대에 순례자의 여정을 다룬 '캔터베리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진실되게 삶에 접근한 영화를 찍고자 했고 그런 가운데 자연스럽게 나 같은 크리스천에게도 감동을 줄 만한 영성에 대한 문제를 건드리는 작품을 만들게 된 게 아닌가 싶다. <캔터베리 이야기>는 어둠에서 시작해서 빛을 향해 나아가는 작품이다. 영화가 밤에 시작하고 주변이 유난히 더 어두운 것은 전시 상황에서의 등화관제와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이 어둠은 단순히 밤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관련된 것뿐만이 아니라 빛과 어둠의 대비라는 영화의 근원적인 속성과도 연결된다. 이런 차원에서 어둠이 효과적으로 사용된 대표적인 영화가 에드워드 양의 걸작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인데 <캔터베리 이야기>도 이 영화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이 어둠은 또한 세 순례자의 마음의 상태와도 관련되어 있다. 각각의 인물들은 각자만의 고민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들의 마음 속의 어둠은 영화의 마지막에 가면 그들에게 기적 같은 은총이 도래하면서 빛 가운데 사라진다. 그리고 그 순간 세 순례자의 여정에 동참해온 관객들 각자의 마음 속에도 작은 빛이 임할 것이다. <캔터베리 이야기>가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영화 속에서 군인들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게 된 것은 당시 영국의 검열 제도와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설정은 순례자를 떠올릴 때 자연스러워보이는 측면이 있다. 신 앞에서는 어떤 신분이 되었든지 간에 순례자라는 점에서는 동등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파웰, 프레스버거의 모든 영화를 통틀어서 보더라도 가장 아름답다고 할 만한 대장간 시퀀스가 있다. 대장간 시퀀스는 공동체를 빼어나게 그려내는 대가들인 존 포드나 장 르누아르의 영화를 방불케 한다. 이 시퀀스는 앨리슨과 밥이 마차를 수리하는 대장간 주인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 전부이다. 이 시퀀스가 아름다운 것은 영상미나 배우의 연기가 뛰어나서가 아니다. 마치 신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카메라가 화면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에게 동일한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인물의 쇼트가 모여서 하나의 공동체로서의 화음을 만들어내는 순간이 경이롭다. <캔터베리 이야기>는 영리한 구성으로 전개된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접착맨'과 관련된 사건이 벌어지고 영화는 밤마다 여성들의 머리에 끈적거리는 액체를 붓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과정을 따라간다. 이러한 추리 구조는 전반적으로 느린 호흡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지루해질 수도 있는 이 영화에 최소한의 긴장감을 부여한다. 주로 밥, 피터, 앨리슨과 마을 사람들의 일상을 소묘하듯이 보여주는 이 영화에는 인물들이 과거의 순례길을 걷거나 마차를 타고 천천히 이동하면서 마을의 풍경을 보는 장면들이 있다. 이 장면들을 통해 관객도 이들과 함께 걷거나 마을의 풍경을 보는 경험을 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한 명의 순례자로서 그들의 여정에 동참하게 된다. 글의 서두에 언급했던 얼굴 클로즈업 쇼트가 등장하는 바로 그 시퀀스에서 앨리슨이 순례길을 걷는 도중에 과거의 세계와 만나게 되는 초현실적인 장면이 정말 압권이다. 다소 느슨하게 전개되는 것 같던 영화의 모든 일들은 영화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하나로 합쳐진다. 그리고 대성당에 도착한 밥, 피터, 앨리슨 그리고 그동안 그들의 순례의 여정에 동참했던 관객 모두는 기적 같은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각자의 인물들에게 도래하는 작은 기적들은 거창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일어날 만한 일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은밀하게 각자의 삶에 관여하는 하나님의 존재를 긍정하게 만든다. 사라져가는 공동체를 위해 범죄를 저질렀던 '접착맨'도 대성당에 있다. 연약한 인간을 상징하기도 하는 그를 아마도 신은 용서할 것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은 자연스럽게 과거의 시간과도 만난다.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등장했던 과거의 순례자들도 밥, 피터, 앨리슨과 같은 은총의 순간을 맞이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현대의 순례자들의 여정은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는다. 우리는 모두 인생의 순례자이다. 너무나 평범해서 오히려 찬란하게 빛나는 영화인 <캔터베리 이야기>와 함께 순례자의 여정에 동참해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좋아요18댓글2
zerkalo4.5콜페퍼는 600년 전 과거의 캔터베리 성지 순례를 떠나던 사람들을 추억하며 아름다운 마을을 위해 스스로 "글루맨"이 되었다고 말한다. 비록 그의 방식은 바람직하다 말하기 어려워도, 앨리슨이 언덕에서 과거와 교감하는 명장면도 그렇고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을 지키려는 그의 생각에는 십분 공감된다. 영화에서 - 물론 현실에서도 - 그러한 것들을 파괴하는 것은 바로 전쟁이다. 영화는 폭격으로 폐허가 된 곳을 강조하기도 하고, 앨리슨과 밥도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갖고 있는 인물들로 묘사한다. (앨리슨은 약혼자가 전쟁 중 죽은 것으로 알고 있고, 밥은 연인에게 편지가 오래 오지 않자 자신을 떠났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영화는 만들어질 당시 진행 중이던 전쟁의 아픔을 드러내고 있지만, 결코 희망을 놓으려 하지 않는다. 기적을 믿는다는 콜페퍼의 대사를 비롯해, 기차에서 피터를 내리쬔 후광과 그가 성당에서 연주하는 오르간, 연인과 끝난 줄 알았던 앨리슨과 밥이 캔터베리에서 받게 되는 기쁜 소식 등, 캔터베리 성지 순례와 접목하여 영화가 주인공들에게 선사하는 기적 같은 감동적인 결말을 통해 그 의지를 내비친다. 찬송가와 함께 마무리되는 영화의 아름다운 마지막 장면에선, 그러한 희망으로 제2차 세계대전도 곧 끝나리라는 현실의 기적도 간절히 바랐을 진심이 가득 느껴진다.좋아요8댓글0
Cinephile4.5대를 이어 기술을 연마한 장인을 통해 과거와 만나는 기묘한 체험이 가능하다면, 그 정신을 계승한 영화도 관객에게 마치 성당을 방문한 듯한 초월적인 경험을 줄 수 있다. 뛰어난 조명 연출 등을 통해 시골 추리물을 전통에 관한 선문답으로 기묘하게 확장시킨다.좋아요5댓글0
오세일4.5왠지 모르게 항상 들떠 있는 듯해 보이는 칠링본 마을의 일상적인 풍경이 좋았다. 무릎을 꿇고 호텔 바닥을 열심히 청소하는 아줌마, 존슨을 깨우며 정신없이ㅡ마치 슬랩스틱처럼ㅡ커튼을 열어 해치는 직원, 호탕하게 웃는 아저씨 등의 지극히 일상적인 사람 사는 모습이 괜스레 아름다웠다. 그런 면에서 <캔터베리 이야기>의 숏은 존 포드의 위대함에 비견된다. 일상의 풍경, 자연, 빛, 어둠으로 조합된 숏에서 파생되는 노스탤지어적인 정서. 그러니까 더 개인적인 감상으로 말하자면,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의 숏을 볼 때와 (거의) 동일한 숭고함을 느꼈다. 가볍고 톡톡 튀는 청년들이 등장하는 추리물과, 그 저변에 내재되어 있는 종교적인 모티브가 묘하게 뒤섞인 이질적인 조화. 하지만 그런 이질감이 전혀 싫지 않다. 오히려 줄곧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확신을 준다. 이런 특징 또한 존 포드 특유의 '아름다운 불균질함'과 동일한 성질을 공유한다. 영화의 러닝타임 절반을 투자하면서까지 정체를 밝히기 위해 노력했던 통칭 '글루맨'의 실체에는, 그다지 큰 반전도 장르적 쾌감도 없다. 오히려 영화는 글루맨이라는 범인을 징벌의 대상으로 낙인 하지 않는다. 글루맨의 범행에는 명백한 '의도'가 엄존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의 발발을 통해 시골의 존재를, 자연의 아름다움을 목도하게 된 존슨과 깁스. 때때로 전쟁의 비극은 일상의 소중함을 환기하게 만든다. 일상에 전쟁이란 불순함이 스며들기 시작할 때, 그제서야 우리들은 비로소 잠시 동안의 안식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다. 글루맨은 그런 '발견'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하지만 군인들은 짧은 안식의 기회를 틈타 여자들을 꼬시기에 바쁘고, 그들의 삶에서 시골은 영원한 뒷전이 된다. 그래서 글루맨은 마을의 모든 여자들을 내쫓기로 결심한다. 정확히 글루맨의 정체가 밝혀지는 시퀀스를 기점으로, 영화는 본격적인 신화의 단계에 돌입한다. 캔터베리 순례길을 걷는 앨리스의 귀에 들리기 시작하는 과거의 소리(들). 말발굽 소리, 사람들의 대화 소리, 악기 소리 등, 카메라는 귀로 과거를 인식하기 시작하는 그녀라는 피사체를 로우 앵글로 담는다. 이 순간 그녀를 포착하는 숏에서는 시간이라는 감각이 무화되며, 땅과 지역의 역사를 인양하는 신화적인 작업이 발현된다. 이른바 '신화적인 숏'. 나는 이때 다시 한번 <캔터베리 이야기>와 존 포드의 상관관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이 뒤로는 모든 숏들이 존 포드스럽다. 다른 의미로 버릴 숏이 없다. 오르간을 연주하는 깁스, 캔터베리 성당의 내부를 인서트 하는 숏의 이미지, 무너진 건물들 사이에 우뚝 솟아 있는 캔터베리 성당의 모습까지. 이 모든 숏들은 곧 영화의 숭고한 정서를 머금으며, 그런 정서는 숏 안에서 기어이 하나의 신화를 창조한다.좋아요3댓글0
그냥영화많이보는사람4.0‘마이클 파웰’의 유머가 여기저기 녹아있는 주체적 여성, 미국군, 영국군의 우정과 기적 이야기. 과거 순례길엔 탱크가 지나다니고 있고, 사람들 마음엔 교양과 신앙이 들어갈 틈이 없다. 모두 전쟁 전 평화롭고 행복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향수병에 걸린 채로 마음 한구석은 텅 비어있는데, 그 작은 틈에 내비치는 축복과 기적. ‘파졸리니’는 이렇게 Holy한 캔터베리에 어떻게 접근했을지 그의 <캔터베리 이야기>도 궁금해진다.좋아요1댓글1
Ordet
5.0
(이 글은 아무나 읽어도 상관없지만 특히 영화에 관심이 있는 기독교인이 더 읽어주기를 바란다.) 3월 26일 수요일 저녁 7시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마지막으로 상영되는 마이클 파웰, 에머릭 프레스버거의 걸작 <캔터베리 이야기>(1944)를 강력하게 추천한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늘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상영되는 트레일러에서 등장하는 한 여성의 얼굴 클로즈업 쇼트를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 얼굴 클로즈업 쇼트가 나오는 영화가 바로 <캔터베리 이야기>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시퀀스에서 그 얼굴 클로즈업 쇼트가 등장하기 때문에 그 쇼트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그 쇼트가 눈 앞에 나타났을 때 감흥이 더 클 것이다. <캔터베리 이야기>는 영국의 유명한 문학 작품인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의 현대판이라고 할 만하다. 보다 정확하게는 2차 대전 시기에 캔터베리 대성당 부근의 한 시골 마을에 머물게 된 세 명의 순례자에 관한 이야기다. 세 명의 순례자는 각각 미국 군인 밥, 영국 군인 피터, 영국인 여성 앨리슨이다. 이 세 명은 마을에서 계속 벌어지는 한 사건의 범인을 추적하면서 각자의 순례의 여정을 밟게 된다. 개인적으로 <캔터베리 이야기>는 지금까지 본 가장 훌륭한 기독교(적) 영화 중의 한 편이다. 내가 신학도는 아니지만 내 신앙 안에서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는 바람직한 영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노골적으로 기독교의 교리를 주입하는 식의 프로파간다적인 기독교 영화가 아니라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삶 가운데 하나님의 존재를 긍정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으므로 대안적인 기독교 영화의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나는 기독교적 영상 컨텐츠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영화를 보고 많은 영감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당장 내 스스로도 이런 류의 기독교 영화에 도전해보고 싶다. 물론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기독교를 의식하면서 이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중세 시대에 순례자의 여정을 다룬 '캔터베리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진실되게 삶에 접근한 영화를 찍고자 했고 그런 가운데 자연스럽게 나 같은 크리스천에게도 감동을 줄 만한 영성에 대한 문제를 건드리는 작품을 만들게 된 게 아닌가 싶다. <캔터베리 이야기>는 어둠에서 시작해서 빛을 향해 나아가는 작품이다. 영화가 밤에 시작하고 주변이 유난히 더 어두운 것은 전시 상황에서의 등화관제와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이 어둠은 단순히 밤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관련된 것뿐만이 아니라 빛과 어둠의 대비라는 영화의 근원적인 속성과도 연결된다. 이런 차원에서 어둠이 효과적으로 사용된 대표적인 영화가 에드워드 양의 걸작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인데 <캔터베리 이야기>도 이 영화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이 어둠은 또한 세 순례자의 마음의 상태와도 관련되어 있다. 각각의 인물들은 각자만의 고민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들의 마음 속의 어둠은 영화의 마지막에 가면 그들에게 기적 같은 은총이 도래하면서 빛 가운데 사라진다. 그리고 그 순간 세 순례자의 여정에 동참해온 관객들 각자의 마음 속에도 작은 빛이 임할 것이다. <캔터베리 이야기>가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영화 속에서 군인들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게 된 것은 당시 영국의 검열 제도와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설정은 순례자를 떠올릴 때 자연스러워보이는 측면이 있다. 신 앞에서는 어떤 신분이 되었든지 간에 순례자라는 점에서는 동등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파웰, 프레스버거의 모든 영화를 통틀어서 보더라도 가장 아름답다고 할 만한 대장간 시퀀스가 있다. 대장간 시퀀스는 공동체를 빼어나게 그려내는 대가들인 존 포드나 장 르누아르의 영화를 방불케 한다. 이 시퀀스는 앨리슨과 밥이 마차를 수리하는 대장간 주인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 전부이다. 이 시퀀스가 아름다운 것은 영상미나 배우의 연기가 뛰어나서가 아니다. 마치 신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카메라가 화면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에게 동일한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인물의 쇼트가 모여서 하나의 공동체로서의 화음을 만들어내는 순간이 경이롭다. <캔터베리 이야기>는 영리한 구성으로 전개된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접착맨'과 관련된 사건이 벌어지고 영화는 밤마다 여성들의 머리에 끈적거리는 액체를 붓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과정을 따라간다. 이러한 추리 구조는 전반적으로 느린 호흡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지루해질 수도 있는 이 영화에 최소한의 긴장감을 부여한다. 주로 밥, 피터, 앨리슨과 마을 사람들의 일상을 소묘하듯이 보여주는 이 영화에는 인물들이 과거의 순례길을 걷거나 마차를 타고 천천히 이동하면서 마을의 풍경을 보는 장면들이 있다. 이 장면들을 통해 관객도 이들과 함께 걷거나 마을의 풍경을 보는 경험을 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한 명의 순례자로서 그들의 여정에 동참하게 된다. 글의 서두에 언급했던 얼굴 클로즈업 쇼트가 등장하는 바로 그 시퀀스에서 앨리슨이 순례길을 걷는 도중에 과거의 세계와 만나게 되는 초현실적인 장면이 정말 압권이다. 다소 느슨하게 전개되는 것 같던 영화의 모든 일들은 영화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하나로 합쳐진다. 그리고 대성당에 도착한 밥, 피터, 앨리슨 그리고 그동안 그들의 순례의 여정에 동참했던 관객 모두는 기적 같은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각자의 인물들에게 도래하는 작은 기적들은 거창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일어날 만한 일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은밀하게 각자의 삶에 관여하는 하나님의 존재를 긍정하게 만든다. 사라져가는 공동체를 위해 범죄를 저질렀던 '접착맨'도 대성당에 있다. 연약한 인간을 상징하기도 하는 그를 아마도 신은 용서할 것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은 자연스럽게 과거의 시간과도 만난다.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등장했던 과거의 순례자들도 밥, 피터, 앨리슨과 같은 은총의 순간을 맞이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현대의 순례자들의 여정은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는다. 우리는 모두 인생의 순례자이다. 너무나 평범해서 오히려 찬란하게 빛나는 영화인 <캔터베리 이야기>와 함께 순례자의 여정에 동참해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zerkalo
4.5
콜페퍼는 600년 전 과거의 캔터베리 성지 순례를 떠나던 사람들을 추억하며 아름다운 마을을 위해 스스로 "글루맨"이 되었다고 말한다. 비록 그의 방식은 바람직하다 말하기 어려워도, 앨리슨이 언덕에서 과거와 교감하는 명장면도 그렇고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을 지키려는 그의 생각에는 십분 공감된다. 영화에서 - 물론 현실에서도 - 그러한 것들을 파괴하는 것은 바로 전쟁이다. 영화는 폭격으로 폐허가 된 곳을 강조하기도 하고, 앨리슨과 밥도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갖고 있는 인물들로 묘사한다. (앨리슨은 약혼자가 전쟁 중 죽은 것으로 알고 있고, 밥은 연인에게 편지가 오래 오지 않자 자신을 떠났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영화는 만들어질 당시 진행 중이던 전쟁의 아픔을 드러내고 있지만, 결코 희망을 놓으려 하지 않는다. 기적을 믿는다는 콜페퍼의 대사를 비롯해, 기차에서 피터를 내리쬔 후광과 그가 성당에서 연주하는 오르간, 연인과 끝난 줄 알았던 앨리슨과 밥이 캔터베리에서 받게 되는 기쁜 소식 등, 캔터베리 성지 순례와 접목하여 영화가 주인공들에게 선사하는 기적 같은 감동적인 결말을 통해 그 의지를 내비친다. 찬송가와 함께 마무리되는 영화의 아름다운 마지막 장면에선, 그러한 희망으로 제2차 세계대전도 곧 끝나리라는 현실의 기적도 간절히 바랐을 진심이 가득 느껴진다.
Cinephile
4.5
대를 이어 기술을 연마한 장인을 통해 과거와 만나는 기묘한 체험이 가능하다면, 그 정신을 계승한 영화도 관객에게 마치 성당을 방문한 듯한 초월적인 경험을 줄 수 있다. 뛰어난 조명 연출 등을 통해 시골 추리물을 전통에 관한 선문답으로 기묘하게 확장시킨다.
오세일
4.5
왠지 모르게 항상 들떠 있는 듯해 보이는 칠링본 마을의 일상적인 풍경이 좋았다. 무릎을 꿇고 호텔 바닥을 열심히 청소하는 아줌마, 존슨을 깨우며 정신없이ㅡ마치 슬랩스틱처럼ㅡ커튼을 열어 해치는 직원, 호탕하게 웃는 아저씨 등의 지극히 일상적인 사람 사는 모습이 괜스레 아름다웠다. 그런 면에서 <캔터베리 이야기>의 숏은 존 포드의 위대함에 비견된다. 일상의 풍경, 자연, 빛, 어둠으로 조합된 숏에서 파생되는 노스탤지어적인 정서. 그러니까 더 개인적인 감상으로 말하자면,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의 숏을 볼 때와 (거의) 동일한 숭고함을 느꼈다. 가볍고 톡톡 튀는 청년들이 등장하는 추리물과, 그 저변에 내재되어 있는 종교적인 모티브가 묘하게 뒤섞인 이질적인 조화. 하지만 그런 이질감이 전혀 싫지 않다. 오히려 줄곧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확신을 준다. 이런 특징 또한 존 포드 특유의 '아름다운 불균질함'과 동일한 성질을 공유한다. 영화의 러닝타임 절반을 투자하면서까지 정체를 밝히기 위해 노력했던 통칭 '글루맨'의 실체에는, 그다지 큰 반전도 장르적 쾌감도 없다. 오히려 영화는 글루맨이라는 범인을 징벌의 대상으로 낙인 하지 않는다. 글루맨의 범행에는 명백한 '의도'가 엄존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의 발발을 통해 시골의 존재를, 자연의 아름다움을 목도하게 된 존슨과 깁스. 때때로 전쟁의 비극은 일상의 소중함을 환기하게 만든다. 일상에 전쟁이란 불순함이 스며들기 시작할 때, 그제서야 우리들은 비로소 잠시 동안의 안식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다. 글루맨은 그런 '발견'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하지만 군인들은 짧은 안식의 기회를 틈타 여자들을 꼬시기에 바쁘고, 그들의 삶에서 시골은 영원한 뒷전이 된다. 그래서 글루맨은 마을의 모든 여자들을 내쫓기로 결심한다. 정확히 글루맨의 정체가 밝혀지는 시퀀스를 기점으로, 영화는 본격적인 신화의 단계에 돌입한다. 캔터베리 순례길을 걷는 앨리스의 귀에 들리기 시작하는 과거의 소리(들). 말발굽 소리, 사람들의 대화 소리, 악기 소리 등, 카메라는 귀로 과거를 인식하기 시작하는 그녀라는 피사체를 로우 앵글로 담는다. 이 순간 그녀를 포착하는 숏에서는 시간이라는 감각이 무화되며, 땅과 지역의 역사를 인양하는 신화적인 작업이 발현된다. 이른바 '신화적인 숏'. 나는 이때 다시 한번 <캔터베리 이야기>와 존 포드의 상관관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이 뒤로는 모든 숏들이 존 포드스럽다. 다른 의미로 버릴 숏이 없다. 오르간을 연주하는 깁스, 캔터베리 성당의 내부를 인서트 하는 숏의 이미지, 무너진 건물들 사이에 우뚝 솟아 있는 캔터베리 성당의 모습까지. 이 모든 숏들은 곧 영화의 숭고한 정서를 머금으며, 그런 정서는 숏 안에서 기어이 하나의 신화를 창조한다.
염세주의자의 일일
4.0
뒷맛이 꽤나 씁쓸하네 시네마테크KOFA, 25.03.26.
호돌이픽쳐스
4.5
인생이라는 곡예에서 비바람을 함께 맞는 3명의 친구들
그냥영화많이보는사람
4.0
‘마이클 파웰’의 유머가 여기저기 녹아있는 주체적 여성, 미국군, 영국군의 우정과 기적 이야기. 과거 순례길엔 탱크가 지나다니고 있고, 사람들 마음엔 교양과 신앙이 들어갈 틈이 없다. 모두 전쟁 전 평화롭고 행복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향수병에 걸린 채로 마음 한구석은 텅 비어있는데, 그 작은 틈에 내비치는 축복과 기적. ‘파졸리니’는 이렇게 Holy한 캔터베리에 어떻게 접근했을지 그의 <캔터베리 이야기>도 궁금해진다.
이 잔은 내가 사도록 하디.
5.0
너무 좋아 영화가 내게 줄 수 있는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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