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오후
Tardes de soledad
2024 · 다큐멘터리 · 스페인, 프랑스, 포르투갈
2시간 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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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오후>는 현역 스타 투우사 안드레스 로카 레이의 초상으로, 전통에 대한 존중과 미학적인 도전으로서 위험을 무릅쓰고 황소를 맞서는 투우사의 내밀한 경험을 되돌아보게 한다.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이 영화는 관객의 트라우마를 자극하거나 심리적 불편감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관람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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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y Oh
4.0
나까지도 눈앞의 붉은 움직임으로부터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 우리를 혈투 한복판에 놓으면서 '스펙타클'에 대한 고찰을 자아내게끔 한다. Serra has us seeing red.
벵말리아
4.0
멋진 몸짓과 강한 눈빛. 투우를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훌륭한 다큐인데, 덕분에 소를 보느라 불편한 내 마음. 인간의 미감이 화려하게 발휘되는 가운데 동물과 적대하는 과격한 폭력의 표현. 투우는 특이한 풍습이구나.
동구리
4.5
영화는 인기 마타도르(matador) 안드레스 로카 레이의 몇몇 경기를 따라간다. 경기가 끝나고 매니저의 도움을 받아 피묻은 경기복을 벗는 장면, 밴을 타고 동료 투우사들과 함께 이동하는 장면, 반데리예로(banderillero)가 던진 작살과 피카도르(picador)의 창에 맞아 피 흘리는 소, 소의 심장에 칼을 꽂으며 경기를 마무리하는 마타도르. 다큐멘터리인 이 영화는 현대에도 벌어지는 잔혹한 전통 유희를 기록한다. 알베르 세라는 투우사와 소가 아닌 대상, 이를테면 경기장의 관중석이나 레이에게 다가오는 팬, 소가 살던 농장과 같은 것들을 단 한번도 보여주지 않는다. 여기에는 죽음이 있고, 죽음 앞에서 흥분한 소가 있고, 그 소를 상대하고자 목숨 건 쇼를 펼치는 인간이 있다. <고독의 오후>는 동물권을 이야기하며 야만적이고 잔혹한 투우를 비판하거나, 혹은 그 반대로 스페인의 어떤 전통으로서 투우를 옹호하지 않는다. <고독의 오후>에는 우리가 투우에 관해 통상적으로 기대할 법한 입장이 없다. 프로듀서 몬세 트리올라는 전주영화제 마스터클래스에서 투우에 관한 입장을 묻는 관객의 질문이 "우리가 촬영하지 않았어도 벌어질 일을 찍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는 질문에 관한 회피가 아니다. 투우사와 소에게만 집중하는 프레이밍은 투우라는 행위 자체의 비윤리와 매혹을, 광기와 쾌감을, 신성과 모독을, 그 모순들을 찍는다. <고독의 오후>는 하나의 '쇼'로서 투우가 가진 허구성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에 관한 영화이지, 윤리적 쟁점을 다루고자 하는 영화가 아니다. 피 흘리며 죽어가는 소, 행운을 빌며 십자가 목걸이에 키스하는 투우사, 환호하는 관객, 소에 받혀 쓰러지는 투우사, 소의 '품종'을 예찬하다가도 경기장에서 저주를 퍼붓는 투우사들,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할 정도로 과장된 투우사의 포즈와 표정, 이것들은 투우라는 허구의 구성물이다. 다시 말해, <고독의 오후>는 목숨을 매개 삼은 픽션의 존재를 찍는다.
샌드
4.0
페루 출신 최정상급 투우사 중 하나인 안드레스 로카 레이의 이야기를 다룬 이 다큐멘터리는, 감독 알베르 세라라는 이름답게 정말 지독하고 아찔해 잊지 못할 것 같은 인상을 또 한번 남긴 강렬한 작품입니다. 알베르 세라의 작품이 원래 대상을 가감없이 전부 보여줘야 한다는 게 핵심 중 하나인지라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보러 들어갔다만, 이렇게 영화의 한 9할 이상이 투우하는 장면을, 그것도 인물은 주로 바스트 샷으로 찍고 황소는 주로 클로즈업으로 찍어 양쪽의 표정과 몸짓과 피가 쏟아지며 처절하게 싸우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줄 거라곤 생각하진 못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알베르 세라 영화에서 모든 걸 가감없이 보여주는 건 대체적으로 움직이나 싶을 정도의 정적인 화면이였다면 이번 작품은 가장 역동적이고 육체적인 에너지가 넘쳐 흐른다는 점에서 같은 방식을 정반대의 이미지로 풀어가는 흥미로운 측면이 있습니다. 근데 이 작품으로 알베르 세라가 새로운 길을 갔다고 말하는 것보단 원래 하던 걸 하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감독으로 더 움직여서 앞으로의 작품은 과연 어떤 곳을 찌를까 기대되기도 합니다. - 이 작품이 가장 흥미로운 건 모든 걸 다 보여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모든 걸 보여주지 않고 영화가 할 수 있는 영역까지만 선을 명확히 긋고 그 안에서만 상세히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이를 넘어가거나 이외의 것은 모두 관객에게 맡기겠다는 듯 진행합니다. 특히 이 작품은 보고 있으면 기본적으로 연민과 슬픔이 가득해 지는데, 반대로 한 순간 딴 생각을 하다 보면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순간과 사투의 연속에 박진감이 넘치면서 탐미적인 카메라에 멋까지 느껴지는 양쪽의 다른 감상이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동시에 들면서 그 선택을 관객의 손에 쥐어 줍니다. 이렇게까지 가까이서 투우를 본 적도, 풀타임으로 본 적도 없어서 제겐 적잖은 충격이 그대로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빨간 천을 들고 있으면 달려가는 황소만 생각나지 그 앞뒤로 수많은 사람들의 준비와 작살과 말을 포함한 대회의 진행 과정, 황소가 쓰러졌을 때 그를 어떻게 처리하는 방법 등을 경악스러울 정도로 가리지 않고 보여준다는 게 충격적입니다. 투우 장면이 좀 반복되길래 딴 생각을 잠깐 하는 순간 하필 영화에서 사고가 터져가지고 그 다음부턴 내내 몰입해 봤는데, 그만큼 이 영화가 아슬아슬하면서 어떤 사고가 터질지 모르는 순간의 공포감으로 극이 진행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러면서 준비와 끝에서 한 개인의 삶을 다룬 이야기까지 보면 정말 딱 투우가 끝나고 나서도 투우사의 투우 장면만을 담았구나 싶습니다.
율은사랑
4.0
이것은 한 투우사에 대한 다큐멘터리이지만 본질적으로 미와 추에 대한 다큐멘터리로 보인다. 투우가 진행되는 투우장 위에는 투우사가 선보이는 우아한 기술과 피를 내는 잔혹한 폭력, 죽음과 관련된 긴장 또는 열광과 그리고 한 투우사의 알 수 없는 열정이 내내 교차한다. 알베르 세라 감독은 투우와 관련된 사회적 논쟁을 굳이 끌어오기보다는 투우의 원시적이고도 잔혹하면서도 고풍적이고 정열적이며 역동적인 스펙터클이 만드는 논쟁적인 아름다움에 천착한다. 비록 영화가 논쟁적인 아름다움을 다룬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마치 미와 추가 서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무도를 추는 것 같은 황홀한 유혹으로 가득 차있다. 순수미학과 추의 미학을 재인식하게 되는 영화적 체험. 추측컨대 이 영화의 제목은 헤밍웨이의 투우에 관한 에세이 <오후의 죽음>에서 왔지 않았을까 싶다. 스페인에서 투우 경기는 오후에 진행되기 때문에 ‘오후의 죽음’은 소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와 비교하면 <고독의 오후>라는 제목은 소가 아니라 투우사의 내면을 드러내는 제목이다. 투우 경기에 나설 때마다 마치 의식을 치르듯 전통의상을 입고 소뿔에 받혀 죽을 위험을 피하며 관중을 열광시킬 기술을 보여야하는 투우사는 어떤 존재인 걸까. 투우장 위에서 프로의식을 떠나서 죽음을 홀로 마주하는 존재로서 한편으로 고독하지 않을까 감히 추측할 뿐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다큐의 주인공의 열정을 더욱 이해할 수 없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그에 대해 경외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Fridaythe13th
4.0
피사체의 자리에 앉은 카메라가 담아내는 것들. - - - - 이 '고독의 오후'라는 제목은 암실 속에서 대기하는 투우나, 낑낑거리며 옷을 입고 숨죽여 기도하며 경기를 준비하는 투우사 모두에게 해당되는 제목일 것이다. 경기장 안에서는 결국 높은 객석 위의 구경꾼들은 투우와 투우사 모두를 스펙타클로 삼기 때문이다. 다만 이 영화는 그 스펙타클을 관객에게는 쥐어주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투우사의 자리에 앉기를 기대하는 관객들을 투우의 자리에 앉힌다. 경기 장면을 보여줄 때 카메라는 위쪽 객석을 보여주지 않는다. 언제나 경기장 바닥에 붙어있다. 투우와 투우사 둘의 관계에서 역시 마찬가지다. 경기 장면에서 우리는 천을 휘두른다는 생각도 잠시, 어느 순간 휘둘리고 있으며, 검을 쥐고 있다는 생각도 잠시, 검에 맞아 피를 흘리고 있다. 사망해 질질 끌려가는 투우의 모습 역시 내려다보지 않고 카메라와 수평적으로 제시한다. 경기 장면의 편집 역시 이게 몇번째 경기이며, 어떤 소와 경기하고 있는지 알 수 없도록 짜여있다. 단지 경기가 끝나고 차에 탑승해서 간접적으로 제시되는 정보가 전부이다. 때론 차량 내부를 찍는 카메라를 인물들의 뒷모습이 가려버리기도 하는데, 이 역시 카메라를 암실 속의 투우 자리에 앉히는 것이다. 중간중간 주인공이 왜 불이 꺼지지 않냐고 투덜거리는 장면이 있다. 그 이유는 투우(카메라)와 투우사(안드레스)가 경기중에 있기 때문이다. 경기가 시작되었을때, 즉 스포트라이트가 비출때, 투우사와 투우는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움직이는 천을 보면 달려드는 투우의 행위며,(물론 생리적 구조 때문이라 하더라도) 거센 소에는 더 거칠게 대응하는 투우사의 행위 역시 그 책임에 해당할 것이다. 고독의 오후의 반댓말을 정열의 오전이라고 한다면 영화는 그 양자를 번갈아 오가면서 흔한 스펙타클의 뒤를 비춘다. 그 흔한 희열도 연민도 아닌, 영화가 쥐어주는 감정은 결국 고됨이다.( 실제로 보고나서 진이 빠졌습니다..) 글의 처음에 언급했듯이 세계 속에서 투우사와 소는 모두 투우의 위치다. 일반적으로 카메라(관객)는 우위를 점하며 스펙타클을 즐기는 입장일테니, 피사체는 모두 투우나 다름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는 카메라를 피사체의 자리에 앉힘으로써 역으로 피사체를 온전히 이해해보려는 시도를 이끌어낸다. 펜스 너머에서 구경해오던 관객들은 이제야 알 것이다. 정열의 오전을 위해 약속된 투우들의 고독의 오후는 이토록 잔혹하고 고되고 (역설적이지만)성스러운 것을.
김도현
3.0
투우 경기로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느끼려면 투우 경기를 보면 된다. 그러나 이걸 구태여 영화라는 포맷으로 옮겨 온다면 이를 상회하는 의미화 작업이 필수적이다. 알베르 세라는 바로 이 대목에서 침묵하므로, 본작이 보여주는 여러 압도적인 순간들을 그의 공으로 돌릴 수 없는 노릇이다. 고로 피사체들에게서 빌려온 충격의 감각은 재빨리 소진되며, 관객들에게 떠넘긴 사유의 작업은 표면을 넘지 못한다. | 202 | 전주국제영화제 | 5/3
오세일
4.0
개인적으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생각났다. 경기장에 오르는 대가로 자신의 육신을 걸고 황소와의 대결을 자처하는 투우사 안드레스. 그의 모습은 마치 대자연의 위압감에 한낱 인간의 존재 따위는 더 이상 의미 없어지는 드넓은 바다에서, 홀로 목숨을 걸고 청새치를 잡는 노인을 연상케 한다. 일부러 스스로를 실존의 무대로 내세우며 끊임없이 존재 가치를 증명해 내는, 어쩌면 살아있다는 감각을 욕망하는 자들의 삶적 투쟁. 안드레스는 자신의 옷에 묻은 피의 양에 따라, 자신의 몸에 새겨진 상처의 개수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절감한다. 그가 위험해 처할수록 엔터테이너적인 가치는 오르고, 그가 황소의 뿔에 받쳐 죽음과 가장 가까워지는 찰나의 순간 그 가치는 정점에 달한다. 그의 실존을 향한 여정은 아이러니하다. 자신의 삶을 증명해 내는 방식이 어떤 생명의 죽음을 담보로 해야지만 비로소 작동되는 부조리의 구조이기에. 그의 가치를 위해 수많은 황소의 목숨이 희생된다. 안드레스가 죽음을 향해 다가갈수록 관객들은 열광하지만, 정작 최고의 만족을 이끌어내는 마지막 한 방은 황소의 도축으로 귀결된다. 자신의 육신을 죽음과 최대한 가까이 맞닿게 하여 호응을 얻어내고, 황소의 목숨을 거두어 그 호응을 온전히 개인의 것으로 만든다. 안드레스가 광대라면, 황소는 광대의 손에 쥐어진 도구이다. 그 쓸모를 다하면 가차 없이 버려질 도구. 그런 비정함의 정서는 칼에 찔려 탈진한 황소의 뇌에 단검이 들어가는 순간, 온몸을 경련하는 와중에도 줄곧 검게 빛나는 황소의 눈빛 클로즈업에서 극에 달한다. 투우를 하는 안드레스의 표정과 몸짓은 마치 투우 그 자체에 매혹된 하나의 피사체를 보는 듯하다. 실존의 증명 이전에 일단 자신의 목숨을 내던진 이 상황 자체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본능을 즐기는 그. 거대한 황소와 두 눈을 마주 보며 서 있는 짧은 몇 초 간의 찰나. 폭풍전야의 시간 동안 내면을 휘감는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이토록 짜릿한 감각. 온몸의 피가 뇌로 쏠리며 각성을 요하고, 두 눈은 잠시 동안 깜빡이는 것조차 잊어버린다. 그 순간에서만큼은 오로지 자신과 황소, 이 둘만이 지구에 존재한다. 그리고 이내 빨간 망토를 향해 돌진하는 황소. 돌진하는 황소를 성공적으로 속이고 농락할 때, 안드레스의 수명은 연장된다. 분명 자칫 잘못하면 황소의 뿔에 받쳐 목숨이 날아갈 위기에 매 순간 놓이지만, 모순되게도 그 과정은 동시에 그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개념으로도 기능된다. 인간의 본능에 스펙터클은 결코 떼놓을 수 없는 욕망의 이끌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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