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인 삶
Tabiate Bijan
1974 · 이란
1시간 33분 · 전체

키아로스타미와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스승격인 감독 소흐랍 샤히드 살레스의 대표작. 살레스는 근대 이란 영화의 미학을 정립시킨 감독으로 이 영화 '정적인 삶'은 살레스 영화 미학의 정수를 보여 준다. 1975년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 수상작. 철도 건널목에서 대부분의 인생을 보낸 한 늙은 남자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 그의 아내는 카페트를 만들어서 집안의 수입을 돕고있다. 군대에서 돌아온 그의 아들은 먹고 자기만 반복하다가 다시 떠나버린다. 어느 날, 그가 퇴직연령에 도달했으며, 새로운 건널목지기가 도착하리라는 편지가 도착한다. 그는 그런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 마을로 가지만,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30년동안 같은 곳에 있으면서, 운명은 이미 분명해졌고 그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Jay Oh
3.5
정지된 삶. 생각할수록 너무나 허탈한 단어들의 조합이다. In this context, what a mortifying combination of words.
maya
4.0
25/10/20(월) 제7회 대전철도영화제 DRaFF에서 상영, 직후 유운성 평론가의 시네토크 진행(감상 하단에 시네토크 내용 일부를 요약). 이 영화는 사회비평적 시선을 들이미는 것이 결례로 느껴질 만큼이나 보편적인 우화이기도 하다. 제도는 네 얼마를 갈아넣어 복무하건 사례하지 않는다. 제도를 질책할 수 있겠지만, 보다도 삶 전반에 걸치는 문제로 환원시켜 마땅하다(작일 시네토크의 표제: “철도와 삶과 영화”). 이 영화만큼은. 또 당시의 이란만이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다. 몇십 년 전인 1940년대에 미국의 극작가 아서 밀러가 미리감치 선보였던 <세일즈맨의 죽음>의 윌리 로먼은 34년 근속한 회사에서 해직당하고 이른바의 레종 데트르(생업이란 늘 기반이요 존엄성이고 정체성의 일부이므로)를 상실한다. <스틸 라이프>(원제와 영제 모두 정물화를 일컫는다)의 주인공도 마침 30년 가량(처음엔 분명 33년이라고 한 것 같은데 내 기억이 정확한지는 의문)을 근속하고 자의에 반하여 퇴직한다. 먹고 살기 위해 축조한 제도(시스템), 이를테면 철도와 세일즈와 이 사회는, 근사하건(아메리칸 드림처럼) 실로 그렇지 않건(이 영화가 그리는 빈곤의 양태처럼) 상관없이, 종사자를 그 인격보다도 기능, 무한히 대체 가능한 톱니바퀴 취급하지 않고서는 굴러가지를 않는다. 여타의 이즘(ism)을 택한단들 실로 시스템이 구사하는 어휘만 달라질 뿐으로 네 시간과 노고에 사례하지 않음은 같다(사회주의 국가의 속사정은 대체로 어떠했는가, 또한 퇴직금이 정말로 젊은 날의 피땀과 수고에 비하겠는가). 이때 시스템이란 삶이 인간에게 작용하는 형식이자 도구일 뿐. 고로 본질적으로 이들에게 나의 고통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지금 내가 겪는 일이 불공평하고 비극적이어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억울해서 치가 떨리고 분통이 터져서 잠을 이룰 수가 없어도. 우리는 삶과 그렇게 관계하지 않으므로. 무슨 말이냐면, 삶은 너와 거래하지 않는다. 적어도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종류의 공정함을 수반하지는 아니한다. 시스템은 근로계약서를 쓰거나 이런저런 숭고한 헌장을 반석 삼고 암송케 하므로 그렇다는 착시를 줄 뿐이요, 실상 마찬가지다. 둘 다 목숨을 부지하게 하는 대신에 한사코 앗아갈 따름이라고. 그래서 차라리 이들은 수고스러운 열차 같은 것이고 승객인 우리는 그것이 가는 방향조차 모른다(매일의 타성에 젖어 “알고 있다” “파악하고 있다”고 착각할 따름이다, 윌리 로먼이나 본작의 노인처럼).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당시 창외의 단편적이고 정물(“still life”) 같은 풍경뿐, 삶이나 체제의 총체성이, 하물며는 왜 내가 송두리째 허물리는 와중에도 그들은 여전히 좋은 집에 살고 농담을 주거니받거니 하는지의 까닭조차 아니다. 아서 밀러의 희곡이 향후 그가 50년대의 매카시즘에 휘말리는 것에 일조했다면(아무래도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있으므로) 이 영화 또한 직접적으로든 아니든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하고 이란 정권의 눈밖에 남으로써 감독 소흐랍 샤히드 살레스의 향방을 결정짓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면 그러한 전개도 어느 정도 예측했을 수 있겠다. 그리고 역사 이래 인류의 대부분이, 아니 사실상 극소수를 제외한 개체 모두가, 태어난 이래 주인공 노부부처럼 일용할 양식을 마련하고자, 실로 힘겹게 버티면서 살고 떠났다. 설탕과 귤 정도로 사치하면서. 철도는 최근 몇 세기의 혁신이자 근대성의 인덱스로서 널리 유용되며 이 영화 내부에도 엄연히 존재할지언정 주인공 부부가 보여주는 삶의 양식은 아이러니하게도(혹은 참으로) 전근대적이고 (근대문명과 자본의 논리에서 소외되고 있는바) 주변부적이다. 하기사 외피만 세련성의 투구로 무장했다뿐 고작해 “먹고 살고자” 분투하는 꼴은 아서 밀러의 윌리도, 지금의 우리도 마찬가지 같다. 이쯤 후기자본주의의 한 개인으로서 느끼는 바를 술회하자면: 삶과 시스템에 대한 위안이나 초월적인 돌파구는 법리 등으로 성문화된 내용의 바깥에서 꾀해야 하는지 모른다(가령 종교나 “돈 안 되는” 삶의 실체에 관하는 순수예술). 물론, 이것들은 인간 본성이나 시스템이 목표하는 ‘잘 먹고 잘 삶’과는 본래가 좀 무관한 것이다. 소흐랍 샤히드 살레스는 결국 전자를 택하였던 것이고. 병존의 가능성을 꾀하여볼 수야 있겠으나 이들 사이 어떤 필연적인 인과를 부여하려는 작업(내지는 마침내 그렇게 해냈노라는 주장)은 애시당초 어불성설일지 모른다. 한편 2025년의 자파르 파니히는 여전히 검열과 싸우고 있다. 이하 유운성 평론가 시네토크 내용 중 일부를 요약해 덧붙인다(*처리는 내 사견): ① “영화에 대한 영화”에서 예를 들어 영사기사가 등장하면 그의 특질은 곧 영화를 상영하지만 관람하지 않음이다. 그가 어떠한 연유로건 영화를 관람하게 되면 그 영화는 실질적으로 종결되는데, 형태적으로 이는 <스틸 라이프>의 주인공 노인이 더는 차단기를 내리지 않고 승객으로서 기차를 타게 되는 것에 유비된다. ①-1 노인의 시점숏임이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네 번뿐으로 이때 노인은 대상과 동시에 자신의 삶 속 특정 장면을 “들여다본”다. 아들의 마른 등에서 내 곤궁한 청년기를, 후임에게서 그때의 나를, 열차의 칸에서 나의 커리어를. 그리고 나 자신의 얼굴은 이 모든 것이 끝나고 최후에 발견되는 것이다. (*에리세의 <클로즈 유어 아이즈>, 공교롭게도 영화와 노감독 그리고 영사기사 등이 등장하며 얼굴과 “본다”라는 행위가 주요히 다루어진다. 이는 (1)과도 연결지어 볼 수 있겠다.) ② 외화면 처리된 사운드와 시계 소리 등 극장 관람만이 선사하는 디테일(유튜브로 관람했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불과 8일을 촬영했으며 전원 비전문 배우로 가용. 고작 두 번째 장편에서 이러한 성과가 가능했던 이유: 살레스는 이미 여러 펀딩 사업 등을 통해 단편 이십여 개를 제작한 후였으므로 기술적 측면에서는 이미 베테랑인 채였다. ③ 이란 국민영화(national cinema)로서의 성격. 살레스의 두 장편은 후대 이란 제작자들이 변주하고 전범 삼을 전형을 제공하였으며 키아로스타미 등의 영화에 스타일적(형식/양식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나, 감독의 도독과 이후 소재적(디아스포라 등) 특수성으로 인해 이란 영화사와 독일 영화사 양쪽에서 “우리 영화”로 취급받지 못하였던고로, 지금까지 충분히 조명되지는 못한 불운의 작품(과 감독). 여건이 허락한다면 감독의 첫 장편 <단순한 사고(A Simple Event, 1973)>를 확인해볼 것. ③-1 관전 포인트(오간 이야기상 자세히는 적지 않겠다 ㅎㅎ): 식문화. ③-2 살레스는 아미르 나데리가 05년도 부국제 당시 프로그램 노트를 직접 작성하였을 정도로 좋아하는 감독이라고 한다. ④ 국내에서 상영되는 족족 제목을 달리 한 비운의 영화라고. 부국제에서는 <늙은 철도원의 조용한 삶>, 02년도 첫 소개 당시에는(그리고 왓챠와 네이버 DB에서는) <정적인 삶>. 이번에는 원제의 “정물화”에 충실한 영제로 소개되었다.
boinda
4.5
기찻길 옆 오막살이의 추억이 있는 분들이라면 서정과 낭만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향수에 젖을 수도 있지만 건널목 간수의 삶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영상을 보고나면 아름다웠던 것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KIWI
3.0
단절시키는 업무를 수행하는 자의 맥없이 단절된 일상을 힘없이 바라보는, 정지된 삶의 망가진 시계, 다 떨어진 설탕, 오래된 카페트, 야위어가는 아들, 낡은 차도르, 힘없는 해고 원신연 감독의 단편 <빵과 우유>처럼 기차는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는데, 우리의 삶은 끝없는 어둠이고 삶은 은하수만큼 길다 기차의 동력에 딸려간 정지된 삶
현이
4.0
철도, 담배, 차(茶). 눈을 감고 노인의 모습을 떠올린다. 담배를 말고, 차를 찻잔에 부어 마신다. 콜록 콜록, 손이 떨린다. 이윽고 나는 낡은 벽으로 둘러쌓은 쾌쾌한 집의 차가운 기운이 느낀다. 우리는 노인을 보면서 무언가를 계속 떠올리게 돼. 어딘가에서 읽은 글인데, 좋은 영화라는 것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본 영화가 아니라 시간의 감각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감각의 영화라고 하던데. 이 영화는 그 예시에 완벽히 들어맞는 영화라고 생각해. 영화는 계속해서 늙은 노인이 굼뜬 손동작으로 담배를 마는 모습, 찻잔에 차를 부어 마시는 모습 (원래 이런 용도로 쓰는 것이라는 걸 듣기만 했는데 이렇게 마시는 것은 처음 봤음) 그리고 생활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소극적으로 대항하는 모습을 쭉 쳐다보듯 담아내고 있어. 그때, 관객은 노인과 동화되어 마치 그 장소에 있는 듯 시간의 흐름을 온전히 느낄 수 있게 되는 것 같아.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 카프카의 말이지? 이것을 모든 예술에 적용시킨다면 영화또한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겠지. 그것을 가장 쉽게 매개할 수 있는 영화적 수단은, 바로 폭력, 비극, 부조리 등 비일상적이고 비인간적인 그 끔직한 형태를 다양한 방법론을 이용해 담아내는 것이야. 그렇기에 지금까지 거론되는 많은 명작 영화는 대개 그런 내용을 담고있지. 이 영화는 그 반대편, 즉 굳이 비일상적 비이성적 상황에서의 그리스 영웅같은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더라도, 그것을 격정적인 영화적 방법론으로 담아내지 않아도 어떠한 예술적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인 것 같아.
Blue on a eye
1.0
● 7th 대전철도영화제 상영작 리뷰 개싫음 ... 이 영화를 구원하려고 할수록 더 이상해지는 듯. 그냥 ... 이란은 이런 스타일적인 양식이 있고 그게 내셔널하게 안착했구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 세계영화사는 결코 다원적일 수가 없음 ... 시네필은 영화의 역사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영화의 역사는 할리우드와 그 기타 등등의 역사임
김선규
4.5
시간조차 멈춘 듯한 고정된 프레임 속에서, 영화는 철도 초소에서 평생을 근무해온 노인의 단순하고 반복적인 삶을 그린다. 그 꾸준함 속에는 묘한 숭고함이 깃들어 있으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세계 속에서도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수행한다. 이미 사회의 흐름에서 밀려난 개인이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리듬으로 하루를 이어간다. 감독의 절제된 연출, 이란 특유의 식문화, 그리고 중간중간 등장하는 인물들과의 대화는 1970년대 이란 사회의 정체된 공기, 경직된 사회의 답답함과 주변부로 밀려난 개인의 고립을 생생히 느끼게 한다. 철도 초소의 고요함은 근대화의 흐름에서 소외된 이들의 현실을 압축하며, 그 침묵은 사회 전체가 느리게 침몰해가는 시대의 공기를 은유하는 듯 하다. 노인의 유일한 위안은 차를 마시는 시간이지만, 기관지가 좋지 않음에도 담배를 피우는 그의 모습은 삶에 대한 가장 솔직한 저항이자, 마지막까지 놓지 않으려는 작은 향락으로도 보인다. 차를 마실 때의 달그락거림, 시계의 초침, 노인의 기침, 요리사의 칼질 소리 등은 느릿한 세계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리듬으로 작용한다. 그 불쾌하면서도 규칙적인 소리들은 침묵의 틈새에서 깜박이는 그들만의 생명의 신호처럼 들린다. 사막의 수평선, 초소의 폐쇄된 공간, 그리고 결코 멈추지 않는 기차는 근대화의 이면에서 어떤 존재들이 배제되고 있는지를 시적으로 드러낸다. 감독은 절제된 미학 속에서 하층민의 단조로운 삶을 하나의 숭고한 예술로 승화시킨다. 이렇게 정적이면서도 독특한 연출은 개인적으로도 처음 보았고, 그 고요한 리듬 속에서 삶의 의지와 허무, 인간의 존엄, 그리고 1970년대 이란 사회의 공기까지 포착해낸 점이 굉장히 인상 깊었다.
멜랑콜리너마저
4.0
정적인 삶에서 배운 차받침의 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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