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4.0이따금, 어쩌면 늘, 포드의 영화엔 남부적인 정서가 흐른다. 포드의 영화를 좋아하긴 하나, 그걸 전부 다 이해한다고 하면 거짓말일 테다. 단적으로 본편이나 <태양은 밝게 빛난다>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거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가까운) '딕시'의 긍지조차 낯설기만 하다. 인종적인 문제 역시 까끌하다. 충실할 뿐만 아니라 행복한 흑인 하인들, 또 백인과의 관계. 물론 태그 갤러거는 스테레오타입적인 묘사 너머 "인종적 장벽을 연결하는 매개자"로서의 프리스트 판사를 말한다. 모든 걸 순순히 동의하긴 어렵지만, 그럼에도 확실히 "흑백 간의 친근한 상호작용"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저지 프리스트>가 <태양은 밝게 빛난다>만큼 복잡하고 미묘, 또 풍부한 윤리를 다루는 것처럼 느껴지진 않지만, 단선적인 플롯에도 여전히 무질서한 난장이 있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오히려 낭만에 가까운 풍경은 역시 (인종이나 신분 따위의 장벽을 넘어서는) "상호작용"으로 가득하다. 특히 침묵으로 가득했던 <태양은 밝게 빛난다>와는 정반대인, 자축과 환호로 채워진 엔딩의 행진까지. 어떤 개념적인 정의나 질서 혹은 정돈을 거부하며 함께 어우러짐은, 어김없이 (포드적인) 화합의 시네마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비록 영화가 품은, 남부를 향한 정서를 채 다 이해하진 못할지언정 언제나 그렇듯 포드의 영화는 세세한 이해를 요하지 않는 따스한 정서를 머금는다.좋아요13댓글0
오세일4.0가문의 명예를 위한 위선보단 내면의 진실됨을, 법정에서의 결과보단 그 과정에서의 인간다움을 더욱 중요시한다. 또한 태생적인 한계 때문일까 고향의 적인 북부에 대한 약간의 편파적인 시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그러한 주관적 이념이 정의를 심판하는 데에 있어 불합리한 개입에 의한 그 어떤 부조리함도 이루어지지 않도록 노력한다. 이처럼 투명하고 정의로운 영혼을 지닌 프리스트 판사이기에, 항상 그의 곁에는 흑인들과의 유례없는 화합의 연대와 타인에 대한 믿음이 줄곧 소멸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호시탐탐 프리스트의 자리를 노리던 호레이스의 모든 발언을 순순히 인정하고 자진으로 해당 사건의 판사직에서 사퇴한 그의 행동은, 어쩌면 이 사건에 있어서 만큼은 주관의 개입을 도저히 막을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기에 나온 숭고한 희생의 결과로도 느껴진다. 앞서 언급한 영화가 그려낸 프리스트의 모든 형태의 인간상은, 아마도 존 포드가 생각한 이상적인 영웅의 고결함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 아니었을까. 영화의 오프닝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감독 개인의 과거에 대한 기억이 고스란히 투영된 작품이 될 것이란 사실을 스스로 밝히는 포부를 보였기에, 어쩌면 <프리스트 판사>의 내적 가치는 더욱 소중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다.좋아요5댓글0
soledad4.0'영화'가 삶을 압도한다. - 목사의 증언대에 서서 이야기를 시작할 때, 존 포드는 그것을 이미지로 구체화하여 관객들에게 제시한다. 이것은 단지 영화 '바깥'의 관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플래시백일 뿐만 아니라 영화 '안'에서 목사의 증언을 듣고 있는 배심원들(혹은 법정 안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펼쳐지고 있는 각자의 플래시백이기도 하다. 그리고 프리스트 판사의 부탁에 따라 제프가 법정 건물 바깥에서 딕시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이미지와 사운드의 결합. 그야말로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영화.좋아요2댓글0
허문영 평론가 봇“집중, 집중.” <저지 프리스트> 첫 장면에서 초상화처럼 정면으로 찍힌 윌리엄 프리스트 판사(윌 로저스)는 의사봉을 두들기며 카메라를 향해 꾸짖듯 말한다. 그런 다음 정작 자신은 쥐고 있던 신문으로 눈을 돌린다. 다소 당황스런 이 장면은 이어진 크레딧 시퀀스 다음 장면에서 흑인 제프 포인덱스터(스테핀 펫칫)의 닭 절도 재판이 벌어지고 있는 법정 시퀀스의 일부임이 드러난다. 프리스트 판사는 검사의 열띤 논고가 이어지는 동안 방청객에게는 잘 들으라고 호통을 치면서도 자신은 재판에 아무 관심이 없다는 듯 태평스럽게 신문 읽기에 계속 몰두하고 있다. “포드는 가장 브레히트적 영화감독이다. 그는 자신을 벌거벗은 모순으로 제시한다.” 장 마리 스트라우브의 이 말을 <저지 프리스트>의 첫 장면보다 더 잘 예시하는 장면도 드물 것이다. 방청객에게 경청을 요구하면서 자신은 경청하지 않는 판사, 사건 자체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과시하듯 딴청을 피우는 판사, 피의자가 실제로 절도를 했는지 여부보다 그가 메기 낚시 미끼로 뭘 썼는지가 더 궁금한 판사. 피의자가 자리에서 졸고 있자 “깨워. 이 법정에서 잘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라고 태연하게 말하는 판사. 첫 장면에서 프리스트 판사가 카메라를 보며 호통 칠 때, 그 호통은 법정의 방청객을 향한 것이면서 동시에 이 영화의 관객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자신이 성실한 책무 이행자가 아님을 노골적으로 선언하는 이 장면은, 프리스트가 성직자를 뜻하는 그의 이름이 암시하는 대로 자신을 법 위의 존재, 도덕적 확신의 존재, 그리고 서사적 규율 밖의 존재로 제시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엉뚱한 희극처럼 보이는 첫 재판 시퀀스는 법정 공방도 생략된 채, 프리스트 판사와 피의자가 낚시를 가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어눌한 흑인이 어떻게 절도 혐의를 벗게 되었는지, 아니 혐의를 벗었는지 여부도 우리는 알 수 없다. 프리스트 판사처럼 존 포드도 재판에 무관심하다. 서사 전체를 통틀어 프리스트의 관심사는 두 가지밖에 없다. 낚시(혹은 크리켓 게임)와 조카의 로맨스. 존 포드는 이 게으른 판사를 주인공으로 삼아 그의 직무태만을 고스란히 드러낸 뒤, 사랑의 중재자로서의 면모에 서사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19년 뒤에 만들어진 이 영화의 리메이크이자 걸작 <태양은 밝게 빛난다>(1953)에 필적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저지 프리스트>는 포드의 이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영화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먼저, 이 영화엔 소란과 신명에 대한 포드의 도취가 처음으로 온전히 표현되어 있다. 주인공이 자신의 직분과 임무를 잊은 듯 혹은 서사가 자신이 제시한 사건을 잊어버린 듯 발산되는 디오니소스적 파토스의 원형이 여기 있다. 이 도취는 역시 윌 로저스가 주연을 맡은 이듬해의 <굽이도는 증기선>(1935)에서 폭발하듯 분출하며, 이후 포드 영화에서 가까스로 억압될지언정 결코 삭제되지 않는 정념의 용암이자 영화적 활력의 원천으로 쉼 없이 작동한다. 이와 연관된 다른 하나는 포드의 주인공의 도덕적 이중성이 이 영화에서부터 뚜렷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포드의 주인공에게는 공동체로부터 도덕적 책무가 부과돼 있지만, 그는 자신의 책무에 은밀히 저항한다. 그는 신성한 책무를 훼손(<젊은 날의 링컨>)하거나 일시적으로 망각(<황야의 결투>)하거나 그로부터 도피(<도망자>)하려 한다. 하지만 이 시도는 대개 갖가지 방식으로 실패한다. 포드 영화에서 공동체적 도덕과 사적 윤리는 끝없는 내적 교전을 벌이며, 그의 서사에는 임무의 완수를 향한 필연적 전개라는 표면 아래, 이 내적 교전의 자의적 혹은 우연적 해소로 귀결되는 부조리와 비합리가 음각되어 있다. 프리스트 판사의 이중성이야말로 공동체의 의무를 짊어진 이후 포드의 주인공들의 숨겨진 분열증을 예기하는 것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윌리엄 프리스트는 순회재판소 판사(선출직)로 30년간 일해 왔지만 요즘은 낚시와 크리켓이 일과의 대부분이다. 죽은 형의 아들 제롬이 법률공부를 마치고 뉴욕에서 돌아온다. 제롬은 엘리 메이를 사랑하지만, 제롬의 어머니는 엘리 메이가 아버지도 알 수 없는 고아라며, 프리스트의 자리를 노리는 주 상원의원이자 법률가 호레이스 메이듀의 딸 버지니아와 결혼시키려 한다. 프리스트는 제롬과 엘리 메이를 맺어주기 위해 갖은 꾀를 낸다. 그러던 중 폭행 사건과 재판이 벌어지고, 프리스트는 피의자 밥 길리스가 엘리 메이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조카 제롬과 함께 프리스트는 판사가 아닌 변호사로 법정에 나서 그를 변호한다. 영화의 배경은 1890년대, 켄터키 주의 한 소도시다. 남북전쟁이 끝난 지 30년이 흘렀지만 프리스트를 포함한 이곳 주민들은 전쟁의 기억과 더불어 살아간다. 정확히 말하면 이들은 북군(Union)과 맞서 싸웠으나 패배한 남부 연합(Confederate)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프리스트는 남부인의 기질을 발휘하고 이용해 밥 길리스의 방면 및 제롬과 엘리 메이의 결합이라는 숙제를 해결한다. 몇몇 포드 영화뿐만 아니라 남북전쟁을 소재로 다룬 미국 영화를 볼 때, 우리 같은 외국 관객이 종종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남부적인 것에 대한 동경에 가까운 향수다. 미국 남북전쟁을 노예해방전쟁으로만 바라보면 이 향수는 노예제도 옹호와 같은 터무니없는 태도로 보인다. 하지만 문제가 그렇게 단순할 리는 없다. 여기엔 제도의 선악과 무관하게 남부 연합이 표상하는 모종의 모럴이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선 미국 학자의 견해를 빌려야 할 것 같다. 노예옹호론자들 뿐만 아니라 남부 충성파들의 생각은 대체로 이러하다. “북부인들은 기록과 돈에만 눈이 먼 야비하고 궤변적인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현실적이고 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며 반면 남부인들은 “관대하고 기사도 정신이 뛰어나며 친절하고 명예를 존중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즉 남부 연합에 대한 향수에는 성문법이 지배하는 북부의 합리적이며 근대적인 생활방식에 대항해 명예와 관습법을 존중하는 “남부의 생활방식에 대한 옹호”라는 면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다니엘 부어스틴, <미국사의 숨은 이야기>, 범양사) 켄터키 주는 남북 전쟁 때 중립을 표방했으나 결국 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 없었고 주민들은 남부와 북부로 갈라져 싸웠다. 하지만 켄터키 주엔 남부 연합에 대한 호의를 지닌 주민들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리스트 판사와 주민들 대부분은 남북 전쟁 때 남부 연합에 소속돼 싸웠으며, 남부 연합 참전군인에 대한 거의 무조건적인 친밀함을 지니고 있다. 그 친밀함은 프리스트 판사에겐 법리는 물론 사건의 사실관계에도 앞서는 것이다. 반면 웅변하기 좋아하고 사실관계를 중시하는 엄격한 법률가의 태도를 지니고 있으며 프리스트의 자리를 노리는 야심가 호레이스 메이듀는 북부의 태도를 부정적인 방식으로 표상한다. 요컨대 프리스트의 남부적 모럴(관습법과 명예)과 판사라는 직책(성문법과 합리)은 불화가 예정된 것이며, <저지 프리스트>의 첫 장면은 이 불화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그가 엄격한 사실에 근거해 판정해야 하는 판사의 책무를 방기하거나 위반하면서까지 흑인 혹은 사회적 소수자에 편에 선다는 점에서 그를 일반적인 노예제도 옹호론자와 같은 부류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 우리로선 긍정적인 의미의 남부적 모럴을 황야의 율법에도 문명의 규율에도 속할 수 없는 서부사나이의 모럴과 겹쳐놓고 보는 것이 맞을지 모르겠다. 프리스트의 정치적 모호성은 곧 존 포드의 모호성이다. 이 영화에서 위대한 남부인의 초상을 그린 포드는 5년 뒤에 가장 위대한 북부인의 초상을 담은 <젊은 날의 링컨>을 만든다. 아마도 포드의 서부사나이는 포드 자신의 범주화할 수 없는 이런 내적 모순을 투영한 인물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포드의 첫 유성 서부극 <역마차>보다 5년 전에 만들어졌지만, <저지 프리스트>를 포드의 또 다른 유사 서부극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재판 시퀀스로 시작한 <저지 프리스트>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 재판 시퀀스로 끝난다. 앞서 말했듯 첫 재판에서 프리스트 판사는 제프의 절도 여부는 무시하고 그가 옛 북군 장군의 하인이었다는 것과 메기 낚시를 잘한다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 이후의 서사 전개는 마지막 시퀀스인 두 번째 재판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다. 내 생각에 두 번째 재판은 포드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통틀어 가장 멋진 시퀀스의 상위에 오를만하다. 이 재판의 피고는 “많이 일하고 말이 없는” 타지 출신의 일꾼 밥 길리스이다. 프리스트와 목사 외엔 그가 엘리 메이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엘리 메이 자신을 포함해, 알지 못한다. 밥은 엘리 메이에 대한 동네 남자들의 험담을 참지 못해 주먹을 휘두르고 이 때문에 법정에 선다. 프리스트 판사는 주먹다짐 현장에서 밥의 편을 들었다는 이유로 판사석에 앉지 못한다. 증인석에 앉은 밥은 왜 주먹을 휘둘렀는지에 대한 질문과 그의 살인 전과와 종신형 선고 전력을 알아낸 검사의 심문에 일체 답하지 않는다. 이때 프리스트가 변호사로 등장해 기막힌 계략을 실행한다. 증인석에 앉은 목사는 비밀엄수 약속을 깨고 입을 연다. 전쟁 당시 남군의 포병대 대위였던 목사는 남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종신형 선고자들로 부대를 충원했다. 목사는 그들 중 한 사람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가 군인으로서 인간으로서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사실과 목숨을 걸고 전우를 구출한 경험담 그리고 이제껏 그가 딸을 위해 매달 생활비를 자신을 통해 전달해온 사실이 목사의 입으로 진술된다. 대부분 남군 병사였던 노인들로 채워진 배심원석은 목사의 증언이 진행되면서 술렁이기 시작한다. 이때 프리스트의 신호에 따라 재판소 바로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프는 하모니카와 북으로 남군의 행진가였던 ‘딕시’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목사가 일어서서 그 병사가 바로 밥 길리스라고 지목하자, 배심원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제프 데이비스(남군 연합의 대통령) 만세’ ‘밥 길리스 만세’를 외치고 재판은 중단된다. 법정은 난장판이 되고, 흑인들은 흥겨운 딕시 연주를 계속하며, 이 소란은 곧바로 남군 베테랑들의 떠들썩한 축하 행진으로 이어진다. 행진하던 베테랑들은 주민들 틈에 있던 밥 길리스를 행렬에 끌어들이고 행진을 계속한다. 이것이 영화의 끝이다. 부동의 재판은 역동의 난장으로 바뀌고, 작은 사실들의 오점은 큰 정신적 우위로 무화된다. 엄격한 정신이 소유자라 해도 이 벼락같은 난장의 활기와 신명에 마음을 뺏기지 않기란 힘들 것이다. <저지 프리스트>는 세부적 규칙과 사소한 사실관계에 집착하는 북부인의 모럴 혹은 근대적 합리주의에 침 뱉는다. 이것은 포드 중기작에서 ‘주정뱅이 천사’라는 전형적 역할로 등장해온 포드의 형 프랜시스 포드의 침 뱉기로 구현된다. 호레이스 메이듀가 언성을 높일 때마다 멀리 떨어진 타구(침통)에 정확히 침을 명중시켜 법정을 번번이 웃음바다로 만들던 이 주정뱅이 배심원은 남부군 베테랑들의 행진에 경의를 표하는 호레이스의 모자 안에 다시 한 번 정확히 침을 명중시킨다. 포드는 예의와 매너로 자신을 치장하는 호레이스 같은 인간을 포용할 생각이 없다. 오늘의 눈으로 이 마지막 재판 시퀀스의 결함을 지적하는 건 쉬운 일이다. 이 재판에서는, 첫 재판에서와 마찬가지로, 폭행 사건에 대한 법률적 판단이 피의자의 삶에 대한 도덕적 판단으로 대체된다. 이는 사실상 근대적 법체계에 대한 부정이다. 더구나 이 도덕적 판단은 이성적 판단이라기보다 일종의 선동으로 이뤄진다. 두 재판에서의 프리스트의 선택이 모두 약자를 구하기 위한 시도라 해도 이건 위험한 포퓰리즘 아닐까. 또 다른 문제는 딕시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모두 흑인이라는 것과 연관된다. 흑인들이 자신들의 해방을 반대한 남부 연합의 군가를 연주함으로써 남부인의 찬미에 가담하는 이 장면에는 만든 사람의 인종주의적 시각이 작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저지 프리스트>에는 이런 비판을 논박할 증거가 없다. 태그 갤러거에 따르면, 이 영화에는 분노에 사로잡힌 주민들의 흑인 린치 장면과 프리스트가 린치 중단을 호소하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스튜디오에 의해 삭제되었다고 한다.(<존 포드>, 이모션북스) 리메이크 작인 <태양은 밝게 빛난다>에서 되살아난 린치 장면이 삭제되지 않았다면 이 영화는 보다 모호하고 복합적인 텍스트가 되었을 것이고 그 장면이 변호의 근거가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저지 프리스트>는, 개봉 당시 상업적 성공을 거두긴 했어도, 당대의 진보적 관객이라면 온전히 긍정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영화였을 것이다. 80여년이 지난 오늘의 관객 그리고 외국 관객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능한 대답은 존 포드가 오히려 결함과 난점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첫 장면에서부터 판사의 직무 태만을 통해 근대적 재판에 대한 무관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그리고 딕시의 연주를 굳이 흑인들에게 맡김으로써, 포드는 결함을 최소화하거나 위장하는 게 아니라 장 마리 스트라우브의 말대로 자신을 ‘벌거벗은 모순’으로 드러낸다. <저지 프리스트>는 엄숙한 재판을 신명의 축제로 순식간에 탈바꿈시킨다. 이 축제는 얼룩과 오점을 고스란히 노출한다. 누군가는 그 얼룩과 오점 때문에 이 영화를 거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같은 이유로 이 영화를 그 얼룩과 오점의 성찰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라도 해도 최종적 판단은 미루는 게 좋을 것이다. 존 포드의 본격적인 필모그래피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좋아요1댓글0
Dh
3.5
화합과 긍정 그리고 소탈한 판사 #🥁
JE
4.0
이따금, 어쩌면 늘, 포드의 영화엔 남부적인 정서가 흐른다. 포드의 영화를 좋아하긴 하나, 그걸 전부 다 이해한다고 하면 거짓말일 테다. 단적으로 본편이나 <태양은 밝게 빛난다>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거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가까운) '딕시'의 긍지조차 낯설기만 하다. 인종적인 문제 역시 까끌하다. 충실할 뿐만 아니라 행복한 흑인 하인들, 또 백인과의 관계. 물론 태그 갤러거는 스테레오타입적인 묘사 너머 "인종적 장벽을 연결하는 매개자"로서의 프리스트 판사를 말한다. 모든 걸 순순히 동의하긴 어렵지만, 그럼에도 확실히 "흑백 간의 친근한 상호작용"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저지 프리스트>가 <태양은 밝게 빛난다>만큼 복잡하고 미묘, 또 풍부한 윤리를 다루는 것처럼 느껴지진 않지만, 단선적인 플롯에도 여전히 무질서한 난장이 있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오히려 낭만에 가까운 풍경은 역시 (인종이나 신분 따위의 장벽을 넘어서는) "상호작용"으로 가득하다. 특히 침묵으로 가득했던 <태양은 밝게 빛난다>와는 정반대인, 자축과 환호로 채워진 엔딩의 행진까지. 어떤 개념적인 정의나 질서 혹은 정돈을 거부하며 함께 어우러짐은, 어김없이 (포드적인) 화합의 시네마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비록 영화가 품은, 남부를 향한 정서를 채 다 이해하진 못할지언정 언제나 그렇듯 포드의 영화는 세세한 이해를 요하지 않는 따스한 정서를 머금는다.
오세일
4.0
가문의 명예를 위한 위선보단 내면의 진실됨을, 법정에서의 결과보단 그 과정에서의 인간다움을 더욱 중요시한다. 또한 태생적인 한계 때문일까 고향의 적인 북부에 대한 약간의 편파적인 시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그러한 주관적 이념이 정의를 심판하는 데에 있어 불합리한 개입에 의한 그 어떤 부조리함도 이루어지지 않도록 노력한다. 이처럼 투명하고 정의로운 영혼을 지닌 프리스트 판사이기에, 항상 그의 곁에는 흑인들과의 유례없는 화합의 연대와 타인에 대한 믿음이 줄곧 소멸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호시탐탐 프리스트의 자리를 노리던 호레이스의 모든 발언을 순순히 인정하고 자진으로 해당 사건의 판사직에서 사퇴한 그의 행동은, 어쩌면 이 사건에 있어서 만큼은 주관의 개입을 도저히 막을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기에 나온 숭고한 희생의 결과로도 느껴진다. 앞서 언급한 영화가 그려낸 프리스트의 모든 형태의 인간상은, 아마도 존 포드가 생각한 이상적인 영웅의 고결함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 아니었을까. 영화의 오프닝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감독 개인의 과거에 대한 기억이 고스란히 투영된 작품이 될 것이란 사실을 스스로 밝히는 포부를 보였기에, 어쩌면 <프리스트 판사>의 내적 가치는 더욱 소중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soledad
4.0
'영화'가 삶을 압도한다. - 목사의 증언대에 서서 이야기를 시작할 때, 존 포드는 그것을 이미지로 구체화하여 관객들에게 제시한다. 이것은 단지 영화 '바깥'의 관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플래시백일 뿐만 아니라 영화 '안'에서 목사의 증언을 듣고 있는 배심원들(혹은 법정 안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펼쳐지고 있는 각자의 플래시백이기도 하다. 그리고 프리스트 판사의 부탁에 따라 제프가 법정 건물 바깥에서 딕시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이미지와 사운드의 결합. 그야말로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영화.
토끼나루
4.5
더 할 것이 없다. 뺄 것도 없다. 오즈 야스지로의 '단호함'과 닮아있다.
Ordet
3.5
남부 공동체에 바치는 따뜻한 헌사.
허문영 평론가 봇
“집중, 집중.” <저지 프리스트> 첫 장면에서 초상화처럼 정면으로 찍힌 윌리엄 프리스트 판사(윌 로저스)는 의사봉을 두들기며 카메라를 향해 꾸짖듯 말한다. 그런 다음 정작 자신은 쥐고 있던 신문으로 눈을 돌린다. 다소 당황스런 이 장면은 이어진 크레딧 시퀀스 다음 장면에서 흑인 제프 포인덱스터(스테핀 펫칫)의 닭 절도 재판이 벌어지고 있는 법정 시퀀스의 일부임이 드러난다. 프리스트 판사는 검사의 열띤 논고가 이어지는 동안 방청객에게는 잘 들으라고 호통을 치면서도 자신은 재판에 아무 관심이 없다는 듯 태평스럽게 신문 읽기에 계속 몰두하고 있다. “포드는 가장 브레히트적 영화감독이다. 그는 자신을 벌거벗은 모순으로 제시한다.” 장 마리 스트라우브의 이 말을 <저지 프리스트>의 첫 장면보다 더 잘 예시하는 장면도 드물 것이다. 방청객에게 경청을 요구하면서 자신은 경청하지 않는 판사, 사건 자체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과시하듯 딴청을 피우는 판사, 피의자가 실제로 절도를 했는지 여부보다 그가 메기 낚시 미끼로 뭘 썼는지가 더 궁금한 판사. 피의자가 자리에서 졸고 있자 “깨워. 이 법정에서 잘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라고 태연하게 말하는 판사. 첫 장면에서 프리스트 판사가 카메라를 보며 호통 칠 때, 그 호통은 법정의 방청객을 향한 것이면서 동시에 이 영화의 관객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자신이 성실한 책무 이행자가 아님을 노골적으로 선언하는 이 장면은, 프리스트가 성직자를 뜻하는 그의 이름이 암시하는 대로 자신을 법 위의 존재, 도덕적 확신의 존재, 그리고 서사적 규율 밖의 존재로 제시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엉뚱한 희극처럼 보이는 첫 재판 시퀀스는 법정 공방도 생략된 채, 프리스트 판사와 피의자가 낚시를 가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어눌한 흑인이 어떻게 절도 혐의를 벗게 되었는지, 아니 혐의를 벗었는지 여부도 우리는 알 수 없다. 프리스트 판사처럼 존 포드도 재판에 무관심하다. 서사 전체를 통틀어 프리스트의 관심사는 두 가지밖에 없다. 낚시(혹은 크리켓 게임)와 조카의 로맨스. 존 포드는 이 게으른 판사를 주인공으로 삼아 그의 직무태만을 고스란히 드러낸 뒤, 사랑의 중재자로서의 면모에 서사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19년 뒤에 만들어진 이 영화의 리메이크이자 걸작 <태양은 밝게 빛난다>(1953)에 필적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저지 프리스트>는 포드의 이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영화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먼저, 이 영화엔 소란과 신명에 대한 포드의 도취가 처음으로 온전히 표현되어 있다. 주인공이 자신의 직분과 임무를 잊은 듯 혹은 서사가 자신이 제시한 사건을 잊어버린 듯 발산되는 디오니소스적 파토스의 원형이 여기 있다. 이 도취는 역시 윌 로저스가 주연을 맡은 이듬해의 <굽이도는 증기선>(1935)에서 폭발하듯 분출하며, 이후 포드 영화에서 가까스로 억압될지언정 결코 삭제되지 않는 정념의 용암이자 영화적 활력의 원천으로 쉼 없이 작동한다. 이와 연관된 다른 하나는 포드의 주인공의 도덕적 이중성이 이 영화에서부터 뚜렷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포드의 주인공에게는 공동체로부터 도덕적 책무가 부과돼 있지만, 그는 자신의 책무에 은밀히 저항한다. 그는 신성한 책무를 훼손(<젊은 날의 링컨>)하거나 일시적으로 망각(<황야의 결투>)하거나 그로부터 도피(<도망자>)하려 한다. 하지만 이 시도는 대개 갖가지 방식으로 실패한다. 포드 영화에서 공동체적 도덕과 사적 윤리는 끝없는 내적 교전을 벌이며, 그의 서사에는 임무의 완수를 향한 필연적 전개라는 표면 아래, 이 내적 교전의 자의적 혹은 우연적 해소로 귀결되는 부조리와 비합리가 음각되어 있다. 프리스트 판사의 이중성이야말로 공동체의 의무를 짊어진 이후 포드의 주인공들의 숨겨진 분열증을 예기하는 것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윌리엄 프리스트는 순회재판소 판사(선출직)로 30년간 일해 왔지만 요즘은 낚시와 크리켓이 일과의 대부분이다. 죽은 형의 아들 제롬이 법률공부를 마치고 뉴욕에서 돌아온다. 제롬은 엘리 메이를 사랑하지만, 제롬의 어머니는 엘리 메이가 아버지도 알 수 없는 고아라며, 프리스트의 자리를 노리는 주 상원의원이자 법률가 호레이스 메이듀의 딸 버지니아와 결혼시키려 한다. 프리스트는 제롬과 엘리 메이를 맺어주기 위해 갖은 꾀를 낸다. 그러던 중 폭행 사건과 재판이 벌어지고, 프리스트는 피의자 밥 길리스가 엘리 메이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조카 제롬과 함께 프리스트는 판사가 아닌 변호사로 법정에 나서 그를 변호한다. 영화의 배경은 1890년대, 켄터키 주의 한 소도시다. 남북전쟁이 끝난 지 30년이 흘렀지만 프리스트를 포함한 이곳 주민들은 전쟁의 기억과 더불어 살아간다. 정확히 말하면 이들은 북군(Union)과 맞서 싸웠으나 패배한 남부 연합(Confederate)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프리스트는 남부인의 기질을 발휘하고 이용해 밥 길리스의 방면 및 제롬과 엘리 메이의 결합이라는 숙제를 해결한다. 몇몇 포드 영화뿐만 아니라 남북전쟁을 소재로 다룬 미국 영화를 볼 때, 우리 같은 외국 관객이 종종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남부적인 것에 대한 동경에 가까운 향수다. 미국 남북전쟁을 노예해방전쟁으로만 바라보면 이 향수는 노예제도 옹호와 같은 터무니없는 태도로 보인다. 하지만 문제가 그렇게 단순할 리는 없다. 여기엔 제도의 선악과 무관하게 남부 연합이 표상하는 모종의 모럴이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선 미국 학자의 견해를 빌려야 할 것 같다. 노예옹호론자들 뿐만 아니라 남부 충성파들의 생각은 대체로 이러하다. “북부인들은 기록과 돈에만 눈이 먼 야비하고 궤변적인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현실적이고 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며 반면 남부인들은 “관대하고 기사도 정신이 뛰어나며 친절하고 명예를 존중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즉 남부 연합에 대한 향수에는 성문법이 지배하는 북부의 합리적이며 근대적인 생활방식에 대항해 명예와 관습법을 존중하는 “남부의 생활방식에 대한 옹호”라는 면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다니엘 부어스틴, <미국사의 숨은 이야기>, 범양사) 켄터키 주는 남북 전쟁 때 중립을 표방했으나 결국 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 없었고 주민들은 남부와 북부로 갈라져 싸웠다. 하지만 켄터키 주엔 남부 연합에 대한 호의를 지닌 주민들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리스트 판사와 주민들 대부분은 남북 전쟁 때 남부 연합에 소속돼 싸웠으며, 남부 연합 참전군인에 대한 거의 무조건적인 친밀함을 지니고 있다. 그 친밀함은 프리스트 판사에겐 법리는 물론 사건의 사실관계에도 앞서는 것이다. 반면 웅변하기 좋아하고 사실관계를 중시하는 엄격한 법률가의 태도를 지니고 있으며 프리스트의 자리를 노리는 야심가 호레이스 메이듀는 북부의 태도를 부정적인 방식으로 표상한다. 요컨대 프리스트의 남부적 모럴(관습법과 명예)과 판사라는 직책(성문법과 합리)은 불화가 예정된 것이며, <저지 프리스트>의 첫 장면은 이 불화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그가 엄격한 사실에 근거해 판정해야 하는 판사의 책무를 방기하거나 위반하면서까지 흑인 혹은 사회적 소수자에 편에 선다는 점에서 그를 일반적인 노예제도 옹호론자와 같은 부류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 우리로선 긍정적인 의미의 남부적 모럴을 황야의 율법에도 문명의 규율에도 속할 수 없는 서부사나이의 모럴과 겹쳐놓고 보는 것이 맞을지 모르겠다. 프리스트의 정치적 모호성은 곧 존 포드의 모호성이다. 이 영화에서 위대한 남부인의 초상을 그린 포드는 5년 뒤에 가장 위대한 북부인의 초상을 담은 <젊은 날의 링컨>을 만든다. 아마도 포드의 서부사나이는 포드 자신의 범주화할 수 없는 이런 내적 모순을 투영한 인물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포드의 첫 유성 서부극 <역마차>보다 5년 전에 만들어졌지만, <저지 프리스트>를 포드의 또 다른 유사 서부극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재판 시퀀스로 시작한 <저지 프리스트>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 재판 시퀀스로 끝난다. 앞서 말했듯 첫 재판에서 프리스트 판사는 제프의 절도 여부는 무시하고 그가 옛 북군 장군의 하인이었다는 것과 메기 낚시를 잘한다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 이후의 서사 전개는 마지막 시퀀스인 두 번째 재판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다. 내 생각에 두 번째 재판은 포드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통틀어 가장 멋진 시퀀스의 상위에 오를만하다. 이 재판의 피고는 “많이 일하고 말이 없는” 타지 출신의 일꾼 밥 길리스이다. 프리스트와 목사 외엔 그가 엘리 메이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엘리 메이 자신을 포함해, 알지 못한다. 밥은 엘리 메이에 대한 동네 남자들의 험담을 참지 못해 주먹을 휘두르고 이 때문에 법정에 선다. 프리스트 판사는 주먹다짐 현장에서 밥의 편을 들었다는 이유로 판사석에 앉지 못한다. 증인석에 앉은 밥은 왜 주먹을 휘둘렀는지에 대한 질문과 그의 살인 전과와 종신형 선고 전력을 알아낸 검사의 심문에 일체 답하지 않는다. 이때 프리스트가 변호사로 등장해 기막힌 계략을 실행한다. 증인석에 앉은 목사는 비밀엄수 약속을 깨고 입을 연다. 전쟁 당시 남군의 포병대 대위였던 목사는 남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종신형 선고자들로 부대를 충원했다. 목사는 그들 중 한 사람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가 군인으로서 인간으로서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사실과 목숨을 걸고 전우를 구출한 경험담 그리고 이제껏 그가 딸을 위해 매달 생활비를 자신을 통해 전달해온 사실이 목사의 입으로 진술된다. 대부분 남군 병사였던 노인들로 채워진 배심원석은 목사의 증언이 진행되면서 술렁이기 시작한다. 이때 프리스트의 신호에 따라 재판소 바로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프는 하모니카와 북으로 남군의 행진가였던 ‘딕시’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목사가 일어서서 그 병사가 바로 밥 길리스라고 지목하자, 배심원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제프 데이비스(남군 연합의 대통령) 만세’ ‘밥 길리스 만세’를 외치고 재판은 중단된다. 법정은 난장판이 되고, 흑인들은 흥겨운 딕시 연주를 계속하며, 이 소란은 곧바로 남군 베테랑들의 떠들썩한 축하 행진으로 이어진다. 행진하던 베테랑들은 주민들 틈에 있던 밥 길리스를 행렬에 끌어들이고 행진을 계속한다. 이것이 영화의 끝이다. 부동의 재판은 역동의 난장으로 바뀌고, 작은 사실들의 오점은 큰 정신적 우위로 무화된다. 엄격한 정신이 소유자라 해도 이 벼락같은 난장의 활기와 신명에 마음을 뺏기지 않기란 힘들 것이다. <저지 프리스트>는 세부적 규칙과 사소한 사실관계에 집착하는 북부인의 모럴 혹은 근대적 합리주의에 침 뱉는다. 이것은 포드 중기작에서 ‘주정뱅이 천사’라는 전형적 역할로 등장해온 포드의 형 프랜시스 포드의 침 뱉기로 구현된다. 호레이스 메이듀가 언성을 높일 때마다 멀리 떨어진 타구(침통)에 정확히 침을 명중시켜 법정을 번번이 웃음바다로 만들던 이 주정뱅이 배심원은 남부군 베테랑들의 행진에 경의를 표하는 호레이스의 모자 안에 다시 한 번 정확히 침을 명중시킨다. 포드는 예의와 매너로 자신을 치장하는 호레이스 같은 인간을 포용할 생각이 없다. 오늘의 눈으로 이 마지막 재판 시퀀스의 결함을 지적하는 건 쉬운 일이다. 이 재판에서는, 첫 재판에서와 마찬가지로, 폭행 사건에 대한 법률적 판단이 피의자의 삶에 대한 도덕적 판단으로 대체된다. 이는 사실상 근대적 법체계에 대한 부정이다. 더구나 이 도덕적 판단은 이성적 판단이라기보다 일종의 선동으로 이뤄진다. 두 재판에서의 프리스트의 선택이 모두 약자를 구하기 위한 시도라 해도 이건 위험한 포퓰리즘 아닐까. 또 다른 문제는 딕시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모두 흑인이라는 것과 연관된다. 흑인들이 자신들의 해방을 반대한 남부 연합의 군가를 연주함으로써 남부인의 찬미에 가담하는 이 장면에는 만든 사람의 인종주의적 시각이 작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저지 프리스트>에는 이런 비판을 논박할 증거가 없다. 태그 갤러거에 따르면, 이 영화에는 분노에 사로잡힌 주민들의 흑인 린치 장면과 프리스트가 린치 중단을 호소하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스튜디오에 의해 삭제되었다고 한다.(<존 포드>, 이모션북스) 리메이크 작인 <태양은 밝게 빛난다>에서 되살아난 린치 장면이 삭제되지 않았다면 이 영화는 보다 모호하고 복합적인 텍스트가 되었을 것이고 그 장면이 변호의 근거가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저지 프리스트>는, 개봉 당시 상업적 성공을 거두긴 했어도, 당대의 진보적 관객이라면 온전히 긍정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영화였을 것이다. 80여년이 지난 오늘의 관객 그리고 외국 관객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능한 대답은 존 포드가 오히려 결함과 난점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첫 장면에서부터 판사의 직무 태만을 통해 근대적 재판에 대한 무관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그리고 딕시의 연주를 굳이 흑인들에게 맡김으로써, 포드는 결함을 최소화하거나 위장하는 게 아니라 장 마리 스트라우브의 말대로 자신을 ‘벌거벗은 모순’으로 드러낸다. <저지 프리스트>는 엄숙한 재판을 신명의 축제로 순식간에 탈바꿈시킨다. 이 축제는 얼룩과 오점을 고스란히 노출한다. 누군가는 그 얼룩과 오점 때문에 이 영화를 거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같은 이유로 이 영화를 그 얼룩과 오점의 성찰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라도 해도 최종적 판단은 미루는 게 좋을 것이다. 존 포드의 본격적인 필모그래피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우울한cut과 유쾌한song
0.5
안과 밖, 그리고 오직 의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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