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일4.51930년에 제작된 서부 영화. 어쩌면 지금껏 내가 본 모든 서부극을 통틀어서 가장 서부극의 기원에 가까이 맞닿아 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20대 초반의 존 웨인이 스크린을 활보하는 것을 바라본다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황홀했지만, 무엇보다 서부 개척이라는 말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정통적 장르의 내러티브가 눈부시게 빛난다. 이를테면 정착지로 향하는 과정에서 길이 온갖 나무로 둘러싸여 지나가기 어려우니 도끼로 나무를 베어 길을 튼다든지, 최대한 안전하게 절벽을 내려가기 위해 기다란 밧줄에 마차와 가축을 묶어 밑으로 경유한다든지 등의 디테일들이 괜스레 감동적이었다. 여타 서부극들에서는 쉽사리 보지 못했던, 영화 바깥 서부 개척시대를 거친 자들에 대한 사소한 이야기들. 어쩌면 '서부'라는 단어와 제일 일맥상통하는 작품이 아닐까. <빅 트레일>은 줄곧 차분한 정서를 유지한다. 물론 서부극의 특성상 무리 사이에서 악당이 등장하고, 인디언과의 전투를 피할 수도 없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한 큰 사건들을 그다지 크게 그리는 데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서부 개척이라는 주된 설정 내부에서 진행되는 잔가지의 이야기는 상투적인 인물들의 뻔한 오해들로 매력 없이 쌓여가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애초에 <빅 트레일>에서 중요한 것은 일단 '서부 개척'이라는 설정 자체라고 말하는 듯한 영화의 한결같은 시선이 인상적이었다. 자꾸만 오해가 늘어가는 남녀 간의 관계, 하지만 끝내 풀리게 되는 오해, 여행의 과정에서 발견하게 되는 악당에 대한 물증 등. 이처럼 관계의 회복과 종말이 반복되는 구도의 플롯이지만, 결국 그 끝에서 남는 것은 꿋꿋이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서부 개척에 성공한 이들에 대한 용기와 사랑이 아니던가. 애초에 서부극에서 중요한 것은 낭만이라고 믿는 영화의 올곧은 태도가 좋다. 수십 대의 마차와 수백 마리의 가축들의 행진. 대규모 이동으로 인해 뿌옇게 진 먼지 사이를 뚫고 오로지 목적지만을 향해 활보하는 피사체들의 결의가 아름답다. 와중에도 끝없이 펼쳐진 황야 사이에서 생명을 잉태하는 숭고함에 대한 운동성. 개, 고양이, 돼지가 새끼들의 젖을 먹이는 장면이 숭고함에 감동을 더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는 반대의 이미지 또한 제시한다. 황량한 대지의 한가운데에서 생명을 잃고 죽은 채로 누워 있는 온갖 가축들의 시체와 뼈들.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번갈아 목도하게 되는 곳, 서부라는 공간. 그렇기에 그들의 행진은 곧 투쟁이다. 지독한 생존을 위한 투쟁의 역동. 이것이 바로 서부극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어떠한 감정의 최대치이며, 이로써 나는 서부극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의도한 숏인지는 모르겠지만 인디언들과의 싸움이 끝난 직후 죽은 자들의 육신을 묻어주기 위해 무덤을 만드는 장면에서, 개 한 마리가 무덤 옆에 누워 발걸음을 멈추는 순간이 포착된다. 죽은 자들을 제외한 산 자들은 모두 그 공간을 떠나고 있는 와중에도 말이다. 그 개는 과연 우연히 포착된 장면의 일부에 불과할까, 아님 주인을 잃은 영혼의 곁에서 영원히 함께 하겠다는 반려견의 순수한 내면에 대한 시각화일까. 사실이 어떻든 나는 후자라고 믿고 싶다. 결국 서부극은 만남과 헤어짐에 관한 이야기를 다룰 때 가장 완전해진다고 생각하기에. 그 장면을 통해 내가 왜 지금껏 이토록 서부극을 좋아했는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단연코 <빅 트레일>의, 아니 어쩌면 서부극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가 아닐까.좋아요8댓글0
김도현4.5단평 | 19세기 미국의 팽창 야욕을 정당화했던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은 당연히 이념적으로 비판하기는 쉽다. 허나 지평선까지 마차 행렬로 수놓은 위대한 장관을 보고 있노라면 심장이 마구 뛰는 걸 어쩔 수 없다. 불굴의 정신으로 북미 대륙을 가로지르는 개척자들을 추동하는 것도 바로 그 낭만이다. 존 웨인과 서부극의 신화가 막 태동하던 시기, 라울 월쉬는 실로 웅대한 대단원의 막을 올린다. | 지하실 소셜 | 005 | 12/12좋아요4댓글0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4.0<빅 트레일>의 모든 요소들은 익스트림 롱숏의 통합성 아래 포섭된다. 월쉬의 후기 서부극 <추적>에서 등장하는 인물을 추방하듯이 깎아지는 절벽과 서부극의 회한,원형으로의 회귀성은 여기에선 나타나지 않는다. <빅 트레일>에서 절벽이란 언제나 넘어가야하는 것이고 서부란 언제나 개척해 나가야하는 곳이다. 물론 그안에서 배신,복수,사랑,전투,죽음이 나타나지만 그것의 수행은 언제나 개척을 향한 진보아래,마차들의 익스트림 롱숏의 포괄성 아래 통합된다. 마차의 행렬은 멈출수 없다.가장 먼저 좋아요를 누르세요댓글0
박상민4.01. 콜맨(존 웨인)과 카메론(마거릿 처칠)의 관계는 멜로드라마적이고, 소프(이언 키이스)와 플랙(타이론 파워)이 콜맨을 죽이기 위해 계략은 짜는 장면은 다분히 갱스터/느와르 장르를 떠오르게 한다. 서부극의 외양 속에 라울 월쉬 감독의 장르적 터치가 공존하며 <빅 트레일>만의 색을 만든다. 2. 사막을 횡단하다가 물이 없어서 죽은 시신들을 묻는 장면, 인디언들과 싸우다가 죽은 이들을 묻고 묘지에서 묵념하는 장면, 콜맨이 끝내 플랙과 로페스를 처단하는 장면. <빅 트레일>의 후반부는 분명 죽음의 이미지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보다 앞선 장면에 정말 뜬금없이 생명력 넘치는 장면이 하나 있다. 이주민들이 힘겹게 강을 건넌 뒤 재정비를 위해 잠시 쉬어가는 장면. 거스는 자신이 쌍둥이의 아빠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뒤이어 망아지가 젖을 먹기위해 어미 말에게 다가오고, 새끼 돼지들과 강아지들도 어미의 젖을 먹고 있다. 그리고 새끼 고양이들은 어미의 주변에서 놀고 있다. 앞선 장면에 딱히 묘사되지 조차 않았던 새생명의 징조와 동물들의 존재는 이 장면에 이르러 갑자기 폭발하듯 등장한 뒤, 이후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죽음을 앞두고 펼쳐지는 이 생명의 이미지는 어떤 의미인가? (라울 월쉬의 작품 세계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가장 먼저 좋아요를 누르세요댓글0
오세일
4.5
1930년에 제작된 서부 영화. 어쩌면 지금껏 내가 본 모든 서부극을 통틀어서 가장 서부극의 기원에 가까이 맞닿아 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20대 초반의 존 웨인이 스크린을 활보하는 것을 바라본다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황홀했지만, 무엇보다 서부 개척이라는 말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정통적 장르의 내러티브가 눈부시게 빛난다. 이를테면 정착지로 향하는 과정에서 길이 온갖 나무로 둘러싸여 지나가기 어려우니 도끼로 나무를 베어 길을 튼다든지, 최대한 안전하게 절벽을 내려가기 위해 기다란 밧줄에 마차와 가축을 묶어 밑으로 경유한다든지 등의 디테일들이 괜스레 감동적이었다. 여타 서부극들에서는 쉽사리 보지 못했던, 영화 바깥 서부 개척시대를 거친 자들에 대한 사소한 이야기들. 어쩌면 '서부'라는 단어와 제일 일맥상통하는 작품이 아닐까. <빅 트레일>은 줄곧 차분한 정서를 유지한다. 물론 서부극의 특성상 무리 사이에서 악당이 등장하고, 인디언과의 전투를 피할 수도 없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한 큰 사건들을 그다지 크게 그리는 데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서부 개척이라는 주된 설정 내부에서 진행되는 잔가지의 이야기는 상투적인 인물들의 뻔한 오해들로 매력 없이 쌓여가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애초에 <빅 트레일>에서 중요한 것은 일단 '서부 개척'이라는 설정 자체라고 말하는 듯한 영화의 한결같은 시선이 인상적이었다. 자꾸만 오해가 늘어가는 남녀 간의 관계, 하지만 끝내 풀리게 되는 오해, 여행의 과정에서 발견하게 되는 악당에 대한 물증 등. 이처럼 관계의 회복과 종말이 반복되는 구도의 플롯이지만, 결국 그 끝에서 남는 것은 꿋꿋이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서부 개척에 성공한 이들에 대한 용기와 사랑이 아니던가. 애초에 서부극에서 중요한 것은 낭만이라고 믿는 영화의 올곧은 태도가 좋다. 수십 대의 마차와 수백 마리의 가축들의 행진. 대규모 이동으로 인해 뿌옇게 진 먼지 사이를 뚫고 오로지 목적지만을 향해 활보하는 피사체들의 결의가 아름답다. 와중에도 끝없이 펼쳐진 황야 사이에서 생명을 잉태하는 숭고함에 대한 운동성. 개, 고양이, 돼지가 새끼들의 젖을 먹이는 장면이 숭고함에 감동을 더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는 반대의 이미지 또한 제시한다. 황량한 대지의 한가운데에서 생명을 잃고 죽은 채로 누워 있는 온갖 가축들의 시체와 뼈들.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번갈아 목도하게 되는 곳, 서부라는 공간. 그렇기에 그들의 행진은 곧 투쟁이다. 지독한 생존을 위한 투쟁의 역동. 이것이 바로 서부극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어떠한 감정의 최대치이며, 이로써 나는 서부극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의도한 숏인지는 모르겠지만 인디언들과의 싸움이 끝난 직후 죽은 자들의 육신을 묻어주기 위해 무덤을 만드는 장면에서, 개 한 마리가 무덤 옆에 누워 발걸음을 멈추는 순간이 포착된다. 죽은 자들을 제외한 산 자들은 모두 그 공간을 떠나고 있는 와중에도 말이다. 그 개는 과연 우연히 포착된 장면의 일부에 불과할까, 아님 주인을 잃은 영혼의 곁에서 영원히 함께 하겠다는 반려견의 순수한 내면에 대한 시각화일까. 사실이 어떻든 나는 후자라고 믿고 싶다. 결국 서부극은 만남과 헤어짐에 관한 이야기를 다룰 때 가장 완전해진다고 생각하기에. 그 장면을 통해 내가 왜 지금껏 이토록 서부극을 좋아했는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단연코 <빅 트레일>의, 아니 어쩌면 서부극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가 아닐까.
김도현
4.5
단평 | 19세기 미국의 팽창 야욕을 정당화했던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은 당연히 이념적으로 비판하기는 쉽다. 허나 지평선까지 마차 행렬로 수놓은 위대한 장관을 보고 있노라면 심장이 마구 뛰는 걸 어쩔 수 없다. 불굴의 정신으로 북미 대륙을 가로지르는 개척자들을 추동하는 것도 바로 그 낭만이다. 존 웨인과 서부극의 신화가 막 태동하던 시기, 라울 월쉬는 실로 웅대한 대단원의 막을 올린다. | 지하실 소셜 | 005 | 12/12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4.0
<빅 트레일>의 모든 요소들은 익스트림 롱숏의 통합성 아래 포섭된다. 월쉬의 후기 서부극 <추적>에서 등장하는 인물을 추방하듯이 깎아지는 절벽과 서부극의 회한,원형으로의 회귀성은 여기에선 나타나지 않는다. <빅 트레일>에서 절벽이란 언제나 넘어가야하는 것이고 서부란 언제나 개척해 나가야하는 곳이다. 물론 그안에서 배신,복수,사랑,전투,죽음이 나타나지만 그것의 수행은 언제나 개척을 향한 진보아래,마차들의 익스트림 롱숏의 포괄성 아래 통합된다. 마차의 행렬은 멈출수 없다.
멜랑콜리너마저
3.0
존 웨인도 풋풋했던 때가 있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박상민
4.0
1. 콜맨(존 웨인)과 카메론(마거릿 처칠)의 관계는 멜로드라마적이고, 소프(이언 키이스)와 플랙(타이론 파워)이 콜맨을 죽이기 위해 계략은 짜는 장면은 다분히 갱스터/느와르 장르를 떠오르게 한다. 서부극의 외양 속에 라울 월쉬 감독의 장르적 터치가 공존하며 <빅 트레일>만의 색을 만든다. 2. 사막을 횡단하다가 물이 없어서 죽은 시신들을 묻는 장면, 인디언들과 싸우다가 죽은 이들을 묻고 묘지에서 묵념하는 장면, 콜맨이 끝내 플랙과 로페스를 처단하는 장면. <빅 트레일>의 후반부는 분명 죽음의 이미지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보다 앞선 장면에 정말 뜬금없이 생명력 넘치는 장면이 하나 있다. 이주민들이 힘겹게 강을 건넌 뒤 재정비를 위해 잠시 쉬어가는 장면. 거스는 자신이 쌍둥이의 아빠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뒤이어 망아지가 젖을 먹기위해 어미 말에게 다가오고, 새끼 돼지들과 강아지들도 어미의 젖을 먹고 있다. 그리고 새끼 고양이들은 어미의 주변에서 놀고 있다. 앞선 장면에 딱히 묘사되지 조차 않았던 새생명의 징조와 동물들의 존재는 이 장면에 이르러 갑자기 폭발하듯 등장한 뒤, 이후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죽음을 앞두고 펼쳐지는 이 생명의 이미지는 어떤 의미인가? (라울 월쉬의 작품 세계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양태현
3.0
무성과 유성의 경계에서
웨스턴
3.0
아직은 여물지 않은 존 웨인.
헐리우드영화인생30년
3.0
시대를 뛰어넘는 배우 존웨인의 시발점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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