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Day4.0“찾아 나선 죽음이 답일 줄 알았으나 똑같은 허무만이 공존” 이제는 알 것 같다.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영화들의 대표적인 공통점은 절제된 감정과 건조함이 작품에 내재되어 있으며, 이것은 <아마도 악마가>라는 작품을 보여주는 것에 있어 상당히 비극적이다. ‘염세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진 주인공이 악마가 만들어 낸 사회에서부터 답을 찾는 것은 결국 ‘죽음’밖에 없다는 것에 대한 일련의 사건의 전개를 보여준다. 똑똑한 교수 도, 어떠한 종교도 구원해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젊은이들의 그 시대상의 비관적인 현실을 잘 나타내었다. 참 시리도록 무정하다고 느낀 것이 바로 엔딩 장면인데, 자살인지 타살인지에 대한 고민은 둘째치고 샤를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죽음을 고하는 것, 그 장면에서 관객이 어떠한 생각 혹은 감정조차 느끼지 못하도록 영화가 끝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문드러져가는 사회에 대한 답이 없는 현실을 이토록이나 절제된 감정과 표정 혹은 연출 등을 통해서 잘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놀라움만이 남는다.좋아요38댓글0
원시기4.0브레송의 영화에는 그 특유의 건조한 구도가 있다. 인물들의 가슴 아래서부터 무릎 위까지를 카메라로 잡아, 상반신과 하반신의 일부만을 제시하여 일련의 반복된 행위들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 때 행위자의 얼굴, 즉 고유성은 제거되고, 그 결과 인류라는 보편적 틀로 규정지어진 개체들의 끊임없는 움직임만이 남는다. 그들은 화면 한 쪽 끝에서 다른 한 쪽 끝으로 걸어갔다가,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몸을 숙였다 물건을 만지작대는 등 영화 내내 기계적인 행동을 반복한다. 일견 무의미해 보이기도 하고 지루하게 계속되는 행위의 연속에 지치기도 하나, 브레송은 감정이 배제된 행위에서 마치 일종의 순수성을 발견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행위의 결과로 발생하는 사건들은 영화가 구현한 세계 속에서 자연스레 필연성을 띠며, 벗어날 수 없는 굴레로 발현되어 인물들을 구속한다. 이렇듯 '캐릭터성이 배제된 개체들의 행위', 그러한 '행위의 연쇄로 인해 발생한 비극적 사건' 과 더불어 브레송의 영화를 구성하는 마지막 요소는 '텁텁한 세계관의 묘사' 다. 마땅히 영화 안의 세계는 영화 밖의 현실을 반영하므로, 이러한 선택은 사회비판적이고 염세적인 면모를 동반할 수 밖에 없다. '아마도 악마가' 에서는 기술과 문명의 발전으로 인한 환경 파괴를 설명하려 상당한 시간을 소모하는데, 집요하게 들이대는 환경 파괴의 광경과 이를 나지막히 규정하는 내레이션 (사실상 영화 속 동아리 학생들 간의 발제 장면에 불과하지만, 일관된 나열의 고집으로 인해 발생하는 지독한 괴리감이 해당 장면을 다른 장면들로부터 분리해낸다), 관객의 예상보다 훨씬 더 길고 운율적으로 표현되는 벌목 장면, 핵발전의 위험성에 대해 질답하는 강의 장면 등은 여타 다른 영화들의 경우처럼 단순한 배경 및 세계관 묘사로 치부하기엔 그 비중과 강세가 상당하다. 본 영화에서는 이외에도 6-70 년대 프랑스 사회에 대한 일종의 혐오라고도 부를 수 있을만한 장치들이 그득한데, 진지한 고찰이 결여된 채 파괴적 욕구의 발산에 불과한 '자칭' 혁명의 실태, 정치적 사상의 무분별한 주입을 위해 동반되는 의도적 선동, 불분명한 기준을 두고 스스로의 지적 허영을 관철시키려 상대를 공격하는 데 무의미한 시간을 소모하는 종교적 토론은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지저분한 성적 욕망을 채우려 자신의 지위와 돈을 이용해 어린 여학생들을 유혹하는 서점 주인 캐릭터는 세속성 그 자체라고도 볼 수 있을텐데, 그는 젊은이들을 방패 삼아 제 손을 더럽히지 않고 교회의 고귀함 (사실 직전의 종교 토론 장면을 기억한다면 해당 어휘 역시 옳은 선택인지 의문스럽지만)을 타락시키려는 비겁함마저 보인다. 또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내세워 샤를의 성장과정을 토대로 그를 멋대로 규정하려는 정신과 의사가 등장하고, 사회비판물에서 빼놓으면 섭할 무능한 공권력 (대표적으로 경찰) 역시 모습을 드러낸다. 경찰과 젊은이들이 물가에서 펼치는 우스꽝스러운 추격전은 실소를 자아낼 만큼 어설프며 그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에 대한 이유 역시 불명확하다. 마지막으로 중증의 마약 중독자로 묘사되는 발랭탱의 존재는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주인공인 샤를이 테제라면 발랭탱은 그의 완전한 안티테제로써, 샤를이 발랭탱에게 자신의 죽음을 사주하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테제가 안티테제에게 의도적으로 제거당하는 변증법적 오류를 이끌어낸다. 애초부터 정은 반과 갈등할 의지가 없으며 한 술 더 떠 스스로의 존재를 포기해버리니, 합이란 무의미한 것이다. 브레송은 행위, 사건, 세계의 3요소를 뒤섞어 그만의 새로운 인과로 재정립함으로써 더없이 비참한 신화를 창조해냈다. 그에게 사회란 도대체 어떤 종류의 악이며, 그 악은 무엇으로부터 기원하고, 이미 악함에 물든 세계 속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상실한 개인은 반드시 파멸할 수 밖에 없는지, 아니라면 고유한 가치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인지, 피곤함과 무력함을 거듭하는 질문들이 내내 꼬리를 문다. 개판이다.좋아요21댓글1
차지훈3.0무력함과 루즈함의 조합 침울하기보단 건조함이 더욱 피부에 느껴지는 영화. 아마도 악마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지 모르겠지만 확실한건 그들에게 있어서 '악마'는 국가이자 정부였다. 제목 보고 사타니즘 관련된 영화인 줄 알고 봤다가 예리한 칼날로 살점을 베어내는 듯한 감독 특유의 연출로 인해 마음 편하게 절대 보지 못했던 영화.좋아요20댓글0
2254.5자유는 고역이지요. 어지간히도 외롭고 어지간히도 지겨운 장거리 경주라구요. 샴페인도 없고, 다정스럽게 당신을 바라보며 술잔을 들어줄 친구도 없어요. 침울한 방 속에서 외로이, 재판관들 앞에 마련된 자리에서 외로이, 그리하여 자기 자신과 대면한 채, 혹은 남들의 심판과 대면한 채 혼자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겁니다. 모든 자유의 끝에는 판결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유는 너무나 무거운 짐인 것입니다. 특히 열이 있다든지 아프다든지 할 경우, 혹은 아무에게도 사랑을 느끼지 않을 경우엔 더욱 그렇죠. (전락, 알베르 카뮈)좋아요19댓글0
FisherKino4.5● 로베르 브레송의 후기작이 비극으로 치닫는 이유를 68이후 무력ㆍ상실ㆍ패배주의 등 사회적 배경에서 찾는 의견이 다수 있다. 확실히 단호하고 타협없는 염세적 비관론에 사로잡힌 청년 샤를르의 6개월의 행적은 뚜렷한 이야기의 인과를 무시하며 병렬적인 에피소드로 진행된다. 자꾸 끌리는 것은 그들의 논쟁이 아닌 여자아이의 눈물, 오픈카에 얹혀 탄 소녀와 일당들의 휘날리는 머리카락, 찰랑이는 물잔, 상대의 눈을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 표정. 이런 편린들이 보는 나로 하여금 내 개인의 추억을 계속 소환시켰다. ● (고백)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비극과는 별개로 내 개인의 추억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슈퍼8, TRV900같은 물건을 들고 어쭙잖은 시나리오로 10여명의 동료 스텝과 한남동의 거리, 철거촌, 지하철 역사, 함박눈이 소복히 쌓인 야산의 중턱 등지를 배회하듯 몰려다니며 촬영하고 웃고 슬퍼하던 시절이 아른거렸다. 수줍게 영화와 우리자신, 우리를 둘러싼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 지난 시간들이 너무나 그립고 처연했다. ● 브레송의 모든 작품을 (사랑하는 이들과 혹은) 홀로 다시 보고 미천하나마 무언가를 만들고 이야기하고 싶다. 2018.07좋아요14댓글0
Jay Oh
3.0
논리를 가장한 이기심, 그 이름은 어쩌면. Partially vanity and indulgence, probably.
MayDay
4.0
“찾아 나선 죽음이 답일 줄 알았으나 똑같은 허무만이 공존” 이제는 알 것 같다.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영화들의 대표적인 공통점은 절제된 감정과 건조함이 작품에 내재되어 있으며, 이것은 <아마도 악마가>라는 작품을 보여주는 것에 있어 상당히 비극적이다. ‘염세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진 주인공이 악마가 만들어 낸 사회에서부터 답을 찾는 것은 결국 ‘죽음’밖에 없다는 것에 대한 일련의 사건의 전개를 보여준다. 똑똑한 교수 도, 어떠한 종교도 구원해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젊은이들의 그 시대상의 비관적인 현실을 잘 나타내었다. 참 시리도록 무정하다고 느낀 것이 바로 엔딩 장면인데, 자살인지 타살인지에 대한 고민은 둘째치고 샤를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죽음을 고하는 것, 그 장면에서 관객이 어떠한 생각 혹은 감정조차 느끼지 못하도록 영화가 끝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문드러져가는 사회에 대한 답이 없는 현실을 이토록이나 절제된 감정과 표정 혹은 연출 등을 통해서 잘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놀라움만이 남는다.
Dh
3.5
세상으로부터 구원받고 싶었던 샤를르, 그 해답은 세상을 등지는 것 뿐이었다..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는건 이 세상 자체에요. #방관 #염세
휭휭
3.0
마지막장면까지 삶이라는게 이렇게도 허무한것이란걸 몸소 보여주며 보는 사람마저 몸서리치게 만든다
원시기
4.0
브레송의 영화에는 그 특유의 건조한 구도가 있다. 인물들의 가슴 아래서부터 무릎 위까지를 카메라로 잡아, 상반신과 하반신의 일부만을 제시하여 일련의 반복된 행위들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 때 행위자의 얼굴, 즉 고유성은 제거되고, 그 결과 인류라는 보편적 틀로 규정지어진 개체들의 끊임없는 움직임만이 남는다. 그들은 화면 한 쪽 끝에서 다른 한 쪽 끝으로 걸어갔다가,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몸을 숙였다 물건을 만지작대는 등 영화 내내 기계적인 행동을 반복한다. 일견 무의미해 보이기도 하고 지루하게 계속되는 행위의 연속에 지치기도 하나, 브레송은 감정이 배제된 행위에서 마치 일종의 순수성을 발견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행위의 결과로 발생하는 사건들은 영화가 구현한 세계 속에서 자연스레 필연성을 띠며, 벗어날 수 없는 굴레로 발현되어 인물들을 구속한다. 이렇듯 '캐릭터성이 배제된 개체들의 행위', 그러한 '행위의 연쇄로 인해 발생한 비극적 사건' 과 더불어 브레송의 영화를 구성하는 마지막 요소는 '텁텁한 세계관의 묘사' 다. 마땅히 영화 안의 세계는 영화 밖의 현실을 반영하므로, 이러한 선택은 사회비판적이고 염세적인 면모를 동반할 수 밖에 없다. '아마도 악마가' 에서는 기술과 문명의 발전으로 인한 환경 파괴를 설명하려 상당한 시간을 소모하는데, 집요하게 들이대는 환경 파괴의 광경과 이를 나지막히 규정하는 내레이션 (사실상 영화 속 동아리 학생들 간의 발제 장면에 불과하지만, 일관된 나열의 고집으로 인해 발생하는 지독한 괴리감이 해당 장면을 다른 장면들로부터 분리해낸다), 관객의 예상보다 훨씬 더 길고 운율적으로 표현되는 벌목 장면, 핵발전의 위험성에 대해 질답하는 강의 장면 등은 여타 다른 영화들의 경우처럼 단순한 배경 및 세계관 묘사로 치부하기엔 그 비중과 강세가 상당하다. 본 영화에서는 이외에도 6-70 년대 프랑스 사회에 대한 일종의 혐오라고도 부를 수 있을만한 장치들이 그득한데, 진지한 고찰이 결여된 채 파괴적 욕구의 발산에 불과한 '자칭' 혁명의 실태, 정치적 사상의 무분별한 주입을 위해 동반되는 의도적 선동, 불분명한 기준을 두고 스스로의 지적 허영을 관철시키려 상대를 공격하는 데 무의미한 시간을 소모하는 종교적 토론은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지저분한 성적 욕망을 채우려 자신의 지위와 돈을 이용해 어린 여학생들을 유혹하는 서점 주인 캐릭터는 세속성 그 자체라고도 볼 수 있을텐데, 그는 젊은이들을 방패 삼아 제 손을 더럽히지 않고 교회의 고귀함 (사실 직전의 종교 토론 장면을 기억한다면 해당 어휘 역시 옳은 선택인지 의문스럽지만)을 타락시키려는 비겁함마저 보인다. 또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내세워 샤를의 성장과정을 토대로 그를 멋대로 규정하려는 정신과 의사가 등장하고, 사회비판물에서 빼놓으면 섭할 무능한 공권력 (대표적으로 경찰) 역시 모습을 드러낸다. 경찰과 젊은이들이 물가에서 펼치는 우스꽝스러운 추격전은 실소를 자아낼 만큼 어설프며 그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에 대한 이유 역시 불명확하다. 마지막으로 중증의 마약 중독자로 묘사되는 발랭탱의 존재는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주인공인 샤를이 테제라면 발랭탱은 그의 완전한 안티테제로써, 샤를이 발랭탱에게 자신의 죽음을 사주하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테제가 안티테제에게 의도적으로 제거당하는 변증법적 오류를 이끌어낸다. 애초부터 정은 반과 갈등할 의지가 없으며 한 술 더 떠 스스로의 존재를 포기해버리니, 합이란 무의미한 것이다. 브레송은 행위, 사건, 세계의 3요소를 뒤섞어 그만의 새로운 인과로 재정립함으로써 더없이 비참한 신화를 창조해냈다. 그에게 사회란 도대체 어떤 종류의 악이며, 그 악은 무엇으로부터 기원하고, 이미 악함에 물든 세계 속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상실한 개인은 반드시 파멸할 수 밖에 없는지, 아니라면 고유한 가치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인지, 피곤함과 무력함을 거듭하는 질문들이 내내 꼬리를 문다. 개판이다.
차지훈
3.0
무력함과 루즈함의 조합 침울하기보단 건조함이 더욱 피부에 느껴지는 영화. 아마도 악마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지 모르겠지만 확실한건 그들에게 있어서 '악마'는 국가이자 정부였다. 제목 보고 사타니즘 관련된 영화인 줄 알고 봤다가 예리한 칼날로 살점을 베어내는 듯한 감독 특유의 연출로 인해 마음 편하게 절대 보지 못했던 영화.
225
4.5
자유는 고역이지요. 어지간히도 외롭고 어지간히도 지겨운 장거리 경주라구요. 샴페인도 없고, 다정스럽게 당신을 바라보며 술잔을 들어줄 친구도 없어요. 침울한 방 속에서 외로이, 재판관들 앞에 마련된 자리에서 외로이, 그리하여 자기 자신과 대면한 채, 혹은 남들의 심판과 대면한 채 혼자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겁니다. 모든 자유의 끝에는 판결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유는 너무나 무거운 짐인 것입니다. 특히 열이 있다든지 아프다든지 할 경우, 혹은 아무에게도 사랑을 느끼지 않을 경우엔 더욱 그렇죠. (전락, 알베르 카뮈)
FisherKino
4.5
● 로베르 브레송의 후기작이 비극으로 치닫는 이유를 68이후 무력ㆍ상실ㆍ패배주의 등 사회적 배경에서 찾는 의견이 다수 있다. 확실히 단호하고 타협없는 염세적 비관론에 사로잡힌 청년 샤를르의 6개월의 행적은 뚜렷한 이야기의 인과를 무시하며 병렬적인 에피소드로 진행된다. 자꾸 끌리는 것은 그들의 논쟁이 아닌 여자아이의 눈물, 오픈카에 얹혀 탄 소녀와 일당들의 휘날리는 머리카락, 찰랑이는 물잔, 상대의 눈을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 표정. 이런 편린들이 보는 나로 하여금 내 개인의 추억을 계속 소환시켰다. ● (고백)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비극과는 별개로 내 개인의 추억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슈퍼8, TRV900같은 물건을 들고 어쭙잖은 시나리오로 10여명의 동료 스텝과 한남동의 거리, 철거촌, 지하철 역사, 함박눈이 소복히 쌓인 야산의 중턱 등지를 배회하듯 몰려다니며 촬영하고 웃고 슬퍼하던 시절이 아른거렸다. 수줍게 영화와 우리자신, 우리를 둘러싼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 지난 시간들이 너무나 그립고 처연했다. ● 브레송의 모든 작품을 (사랑하는 이들과 혹은) 홀로 다시 보고 미천하나마 무언가를 만들고 이야기하고 싶다. 20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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