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인간을 사랑한 소년과 신을 더 사랑한 소녀.
어긋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슬픈 운명.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앙드레 지드의 대표작.
1947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앙드레 지드의 대표작 <좁은 문>이 펭귄클래식 시리즈로 새롭게 번역돼 출간되었다. 실제로 사촌 누이와 결혼한 작가 자신의 삶이 투영되어 있는 이 작품은, 등장인물들의 정교한 심리묘사를 통해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부여된 모순과 갈등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일찍이 사르트르는 그를 가리켜 “상징주의의 낡은 관습으로부터 현대 문학을 길러낸 작가”라고 말한바 있다.
두 남녀의 얽히고설킨 사랑, 그 속의 진심과 오해 그리고 착각이 빚어내는 드라마.
<좁은 문>은 서로 사랑하는 사촌지간의 두 남녀가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비극을 맞게 되는 과정을 나레이션과 편지, 일기와 같은 다양한 화법을 통해 섬세하게 다룬 작품이다.
파리에 사는 제롬은 해마다 여름휴가를 노르망디 시골의 이모부 댁에서 보낸다. 그 집에는 알리사와 쥘리에트라는 두 딸이 있는데, 제롬은 그 중 언니인 알리사를 사랑하고 있다. 알리사 역시 그를 깊이 사랑하지만 좀처럼 그에게 마음을 열지 않고 일부러 거리를 둔다. 독실한 신앙을 가진 그녀로서는 자기를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면 천국 같은 건 없어도 그만이’라는 제롬의 사랑이 그의 영혼을 위험에 빠뜨리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를 사랑하는 것보다 훌륭한 일을 위해 태어난 그가 아니옵니까? 그가 저로 인하여 걸음을 멈추게 되는데도 제가 계속 그를 사랑할 수 있겠사옵니까? - 본문 p. 184
그녀가 이렇게까지 생각하게 된 데에는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 집을 나가 버린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가족 모두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그 사건이 그녀로 하여금 세속적인 사랑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알리사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려운 제롬으로서는 그녀가 야속하고 원망스럽기만 하다.
아! 한때 내 것이었던 그 행복을 돌려줘. 난 그 행복 없이는 살 수 없어. 평생 동안 기다릴 수 있을 만큼 너를 사랑해. 하지만 네가 나에 대한 사랑을 멈춘다거나, 내 사랑을 의심한다는 생각이 들 때는 나로서도 견디기 힘들어. - 본문 p. 67
한편 동생인 쥘리에트가 내심 제롬을 사모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리사가 그를 멀리 하게 되는 또 다른 이유다. 그러나 제롬은 그런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오히려 쥘리에트에게 알리사에 관한 고민을 털어놓곤 하는데, 결국 쥘리에트는 언니를 위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결혼해 버리고 만다. 그런 동생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알리사의 태도에는 변화가 없고 제롬은 그녀에게 차츰 지쳐간다. 그러던 어느 날 쥘리에트로부터 갑자기 날아든 알리사의 부고. 이제 제롬에게 남은 것은 알리사가 자신에게 남긴 한 권의 일기장과 그녀에 관한 추억뿐이다.
과연 지상에서의 행복이 천상으로 향하는 길에 배치되는 것일까?
가톨릭 교회는 지드의 사후 그의 작품들의 금서 목록에 올렸다.
발간 당시 앙드레 지드에게 처음으로 대중적 호응을 안겨준 <좁은 문>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해석이 분분한 작품이다. 일군의 비평가들은 작가의 의도가 알리사의 숭고한 희생과 절대 추구를 찬양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에 따르면 알리사는 참으로 신실한 기독교인이자 어떤 면에서는 성녀로까지 볼 수 있다. 그에 반해 그녀를 잘못된 신앙으로 인해 스스로 파멸에 이르는 시대착오적인 인물로 바라보는 시각 또한 존재한다. 그쪽에서 보면 알리사는 신기루 같은 천상의 세계를 좇아 지상에서의 행복을 저버린 광신자이다.
이처럼 엇갈린 해석에 대한 작가 자신의 태도는 모호하다. 전자의 견해에는, 이 작품이 앞서 나온 <배덕자>와 마찬가지로 비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명확히 한다. 즉 <배덕자>가 도덕과 종교의 굴레에서 해방된, 지나친 개인주의의 위험을 경고하는 작품이라면 <좁은 문>은 과도한 자기희생을 통해 종교적인 지복을 추구하는 기독교 신비주의를 고발하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지드는 자신이 큰 애착을 갖고 알리사라는 인물을 그렸으며, 그녀의 행동에 대해서는 완전히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을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은 순수한 종교적 감동이며, 이 작품을 쓴 목적이 알리사의 도덕적 위대함을 찬미하기 위해서라고 밝힌 바 있다.
이와 같은 모호성은 작가의 인간관 및 세계관이 직접 투영된 결과이고, 궁극적으로는 인간 존재의 불가해성을 드러내기 위한 작가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여전히 영과 육, 성과 속의 갈등이라는 전통적 주제의 범위 안에 머무는 것처럼 보이는 이 작품에 간과해서는 안 될 현대성을 부여하며, 작가가 동원하는 다양한 글쓰기 방식과 더불어 내용의 깊이를 한층 더하는 역할을 한다.




한현구
4.0
금욕이란 어쩌면 탐함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금함을 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전우석
3.5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마음을 결정하는 일은 생각만큼 어렵지 않다. 정말 어려운 것은 실제로 그 문을 통과하는 것이다. 인간 세계에는 분리시킬 수 없으면서도 이원적인 모순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양극단 사이에서 한가지를 선택한다는 것은 또 다른 한가지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한가지를 포기하고 나서야 이 좁은 문 사이를 간신히 비집고 통과할 수 있는 것이다. 중후반부까지도 우리는 알리사에게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정작 알리사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답답했던 사람은 이 좁은 문을 신앙과 사랑 둘 다 짊어지고 같이 통과하기를 바랐던 제롬 본인이었다. 1. 사랑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가 아니니... 2. 찾아야 할 것은 결코 마음의 해방이 아니라, 바로 '감격'이야. 마음의 해방이란 언제나 그 가 증스러운 오만이 따르거든. 3. 나는 거기에서 애정의 충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결심을, 그리고 말하기는 두려운 일이지만, 사랑보다는 오히려 예의를 발견하지나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4. 그러나 대상을 잃은 사랑에 집착한다는 것이 이제부터는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것은 고집이라는 것이다. 5. 덕과 사랑이 한 데 어울려 질 수 있는 영혼을 지닐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강중경
2.5
종교적 관습과 인간적인 사랑의 갈림길에서 헤매이는 슬픈 연인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지만,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한다면 과연 이 연인들을 욕할 수 있을까? 인간 이상의 초월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 종교의 이유 중에 하나이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론 그 무엇도 인간보다 우선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천국을 가기 위해 한번뿐일지도 모르는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건 너무나도 바보같은 짓일지도 모른다.
MMXXII
3.5
사후에 좁은문에 들어가 준비된 '더 좋은 것' 을 누리기 위해 '덜 좋은 것' 이라 명명되는 현재와 과거의 행복을 희생해야만 하는 아이러니. 신이 만물의 어버이라면 제 자식에게 주어진 행복의 희생을 강요할지 의문이다. 한심하게 보면 애들 장난 같아서 웃음만 나고 심각하게 보면 꽤 진지한 딜레마. 명확한 메시지가 아니었다면 초반에 잠깐 작가의 의도를 반대로 해석할뻔...😌
타란taran
2.5
지나치게 망설이는 제롬을 보고 과거의 날 보는 것 같았다. 아니지 솔직하게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J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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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종민 추천작품
또띠
4.0
나도 알리사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덕과 사랑은 같이 갈 수 없다는 생각. (온전한 덕이란 소유욕도 질투도 집착도 없는 상태)사람의 우상됨은 곧 하나님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지상에서 사랑이라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을 위배하는 것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래서 인간을 사랑하는 것 자체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숭고해야한다는 생각. 그를 놓아주는 것이 그가 참된 좁은길로 갈 수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는 생각. 그런 생각들은 어쩌면 하나님만 믿어야 하는 그 신념에 부합하는데도 불구하고 알리사는 스스로 자살이라는 죄를 낳았다. 살인은 죄인데 알리사는 하나님을 가장 드 높이기 위해 바위 위에 올라가기 위해 살인이라는 죄로 하나님의 사랑에 배신을 한다. 그건 알리시가 잘못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고있었음의 반증이다. 알리사는 하나님을 위로 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제 1로 숭고하게 믿어야 한다고 하면서 결정적으로 하나님세계와 정반대인 지옥으로 가는 모순을 저지르고 만다. 그녀는 이러한 믿음이 없었다. : 하나님이 알리사를 사랑하고 알리사의 삶에 축복을 줄 거라는 믿음. 하나님이 사랑으로부터 알리사에게 쾌락을 선물하고 복을 줄거라는 믿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요,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맥락이라는 믿음. 알리사는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믿음이 없는 여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소설 내내 사랑과 하나님은 대척점을 이루며 전개된다. 그래서 인간끼리의 사랑에 하나님이 축복을 내릴 것이라는 단순한 긍정도 찾지 못했다. 그녀는 금욕주의에 빠져서 하나님 믿는 상태의 나르시시즘에 빠져있었을 뿐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자는 믿는 상태의 "나"에 대해 지나친 우상으로 섬겨서는 안된다. 제롬도 알리사도 경건함, 금욕주의, 숭고한 인생을 우상삼다가 자신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지 못하고 이루지도 못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진정한 좁은 문일까. 무조건 가기힘든 길이 하나님이 열어놓은 좁은 문이 아닌데, 이들은 힘들어야만 완성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충분조건을 필요조건으로 잘못 해석 했다해야하나. 어쩌면 단순하게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좁은 문이란, 그들의 사랑에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확신하듯이 서로를 확신하는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부족한 인간을 내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것. 그게 바로 진정한 좁은 문이 아니었을까.
해사
1.0
수명을 다한, 너무 오래된 이야기. 이해하려 하면 할 수록 괴로울 뿐이다. 현시대에 이 작품이 남기는 것이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번역도 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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